memoire

2017년 4월 21일 오후 13:53

sunha 2017. 4. 21. 13:53

사실 문화는 없앨 수도 없고 그렇다고 만족시킬 수도 없는 출구 없는 욕망의 상황을 피하는 과정에서 생긴 것이다.

만족과 제거 사이에는 비록 어려운 길이지만 '승화'의 길이 있다.

그러나 그런 어려운 상황에 처한 것은, 사람이 더 이상 동물도 아니고 그렇다고 신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은 엔젠의 그라비다에 나오는 영웅처럼 '망상과 꿈'을 창조한다.

우화 같은 것의 기능을 베르그송은 닫힌 사회와 연관시켰는데, 프로이트는 환상과 연관해서 생각한다.

프로이트가 볼 때, 우화는 사람이 짜낸 전략이다.

단념하면서, 단념 너머로 꾸민 전략이다. 그런 프로이트의 생각은 매우 심오하다.

현실 원칙이 쾌락 원칙의 길을 막기 때문에 사람으로서는 다른 방법으로 즐기는 길을 만드는 수밖에 없다.

사람은 '승화'할 수 있는 존재다.

그러나 승화한다고 비극이 사라지지 않으며, 비극은 다시 되살아나온다.

위로도 마찬가지다. 육체와 세상과 남이 안겨주는 고통에서 버티는 기술과 불가피한 희생의 조화가 위로라면, 그 위로에도 해는 있다.

 종교의 환상과 강박 신경증이 닮음꼴이라는 사실은 사람이, 본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성숙한 것 같아도, 좀더 위장된 형태로 첫 비극인 유아기의 비극이 다시 출현한다는 것이다.

적어도 프로이트는 오직 예술에만 위험이 없는 것 같다고 믿었다.

어둠의 세력을 부드러운 주술로 '약하게 만드는'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힘을, 예술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예술에서 격렬함, 도전 능력, 탐구하고 파고들면서 새로운 문제를 폭로하는 힘을 보았다.

그래서 프로이트는 예술에 대해서만은 의심치 않고 권능을 인정했다.

(리쾨르 <해석의 갈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