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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프랑스철학회 제1회 학술대회

sunha 2005. 7. 7. 21:01
 

【발표1】 현대 프랑스 철학의 구조주의 및 탈구조주의적 흐름


나의 철학적 사유의 길과 현대 프랑스철학

-구조주의와 해체주의를 중심으로-


                                          김형효(한국학중앙연구원)



1. 生철학과 실존적 현상학의 공부과정과 脫自我의 암시

   

현대 프랑스 철학의 어떤 계보들은 나의 철학적 사유의 行程上의 寶庫였다. 지금 나는 불교와 老莊철학과 독일 라인강 지역의 신비주의(Meister Eckhart, N. Kusanus, M. Heidegger)와 스피노자(B. Spinoza)의 자연신학이 공생하는 無의 존재론에 깊이 침잠해 있지만, 지금의 이런 사유를 이끌어준 철학이 아래에서 언급하고자 하는 현대 프랑스 철학의 흐름이었다. 그 흐름은 베르크손(Bergson)의 생철학(la philosophie de la vie)과 마르셀(G. Marcel)과 메를로-뽕띠(M. Merleau-Ponty)를 대표하는 실존주의(l'existentialisme)를 출발점으로 하여 이어서 소쉬르(F. de Saussure)와 레비-스트로스(Cl. Lévi-Strauss), 라깡(J. Lacan)과 푸꼬(M. Foucault)를 잇는 구조주의(le structuralisme) 사상과 그리고 탈구조주의로서 흔히 해체주의(le déconstructionisme)라고 불리워지는 데리다(J. Derrida)와 바따이유(G. Bataille)까지를 일컫는다. 바슐라르(G. Bachelard)와 깡길렘(G. Canguilhem)과 다고녜(F. Dagognet), 떼야르 드 샤르댕(P. Teilhard de Chardin) 등을 좋아했으나 그들은 길게 나를 동행한 도반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 짧은 논설은 구조주의와 해체주의에 대한 사전적 설명의 글이라기 보다 오히려 오늘의 나를 있게 해 준 나의 철학적 선지식들에 대한 고백의 뜻이 더 강하다 하겠다.

내가 처음으로 접한 프랑스철학자는 마르셀로서 몸의 실존적 느낌과 마음의 존재론적 구원의 두갈래를 不一而不二의 관계로서 해석한 그의 사상이 나를 사로잡았다. 내가 지금 불교의 종교적 사유에 깊이 젖은 것은 그를 통해 익한 가톨릭의 종교적 구원의 요구가 변형되어 나에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의 철학은 <나의 몸>(mon corps)을 통한 실존적 감각적 느낌(la sensation existentielle)과 몸의 실존적 차원을 넘는 <존재론적 요구>(l'exigence ontologique)가 지향하는 관여(la participation)의 두가지 양상이 <cogito>의 철학적 진리에 대한 거부로서 나에게 와닿았다. 그는 싸르트르(J.-P. Sartre)처럼 cogito와 의식의 철학자는 아니었다. 그의 철학은 은연중에 의식이 하나의 거추장스런 짐과 같다는 사유를 나에게 뿌렸다. 그의 철학은 단적으로 관여의 철학인데, 그 진리는 단적으로 心物合一의 경지를 안내한다. 이 진리는 뒤에 불교적이고 노장적인 사유를 내가 체득하였을 때에, 다시 無와 空에의 관여로 나의 사유를 禪的으로 이끈 계기로서 작용한다. 그의 철학사상은 <소유와 존재>(l'avoir et l'être)의 구분이 대단히 중요함을 가르쳐 주었다. 존재와 소유의 철학은 다시 베르크손과 독일의 하이데거(M. Heidegger)의 철학에서 각각 얻은 본능과 본성(직관), 그리고 존재(Sein=être)와 존재자(Seiendes=étant)의 철학의 구분과 연계되어 나타난다. 좌우간 <cogito>의 철학은 마르셀가 하이데거가 바판한 소유와 존재자의 철학으로서, 이것은 다시 베르크손의 뜻에서 본능을 대신한 지능의 철학이 된다.

메를로-뽕띠는 마르셀에 이어 두 번째로 나에게 찾아 왔다. 그의 철학은 마르셀의 실존적 몸의 철학과 너무 유사하다. 그는 싸르트르와 동급의 탁월한 현상학자였지만, 싸르트르의 <cogito>철학과는 이미 다른 길을 갔다. 그가 <cogito>의 의식을 말하지만, 그 의식은 이미 바깥 세계 앞에선 투명한 의식의 주체가 아니고, 바깥세계와 이미 혼융된 半心半物의 애매모호한 영역으로서 <반성이전의 주체>(le sujet pré-réflexif)인 지각(la perception)이다. 그 지각도 無의식(inconscient)에 가까운 전의식적(préconscient)인 무심한 수준의 지각으로서의 <on perçoit=it is perceived>이다. 그의 의식은 몸과도 이원적으로 분리가 안되는 <살>(la chair)로서 어떤 실존적 분위기(une ambiance)와 다를 바가 없고, 사회역사도 실존의 지각과 같이 가는 공간시간의 상황에 불과하다. 구체적 사회역사를 떠난 추상적 사고는 무의미하다. 몸이라는 실존적 상황을 벗어난 생각이 공허하듯이, 역시 모국어의 말(la parole)로서 표현이 안되는 생각은 다 틀이 안잡힌 구름잡는 헛소리일 뿐이다. 그는 마르셀만큼 구체철학의 화신이다. 나는 이런 프랑스 철학이 무척 좋았다. 그의 존재론도 구체적이다. 존재는 보이는 가시적 현상을 통해서 현시되는 안보이는 깊이의 의미다. 현실역사도 의미의 엄숙주의와 무의미의 허무주의를 다 스쳐지나간다. 현실은 약간씩 의미가 있고, 동시에 또 약간씩 무의미하다. 

마르셀과 메를로-뽕띠는 나에게 베르크손의 철학적 크기를 암시했다. 베르크손의 생물 철학은 인간을 자연적 동물과 비유하면서 인간을 해석하였다. 인간의 공작적 지능과  동물의 무위적 본능은 서로 유사하면서 다른 점이 있다. 둘 다 생명의 생존(le survivire de vie)을 위한 앎의 術(l'art de savoir)인데, 본능(l'instinct)은 닫혀 있는 직접적 앎의 術(l'art clos du savoir immédiat)이고, 지능(l'intelligence)은 열려 있는 간접적 추리적 앎의 術(l'art ouvert du savoir médiat et discursif)이라는 점이 다르다. 그런데 인간에게 지능이외에 직관(l'intuition)이라는 또 다른 능력이 있는데, 그것은 정신의 세계를 파악하는 무한의 열린 지혜(la sagesse)를 이해하는 힘이다. 이것은 동물적 본능과 같이 한 번 보면 사태를 파악하는 능력이라는 점에서 본능과 유사하다. 그러나 동물의 본능은 직관처럼 직접적이긴 하나 정확하고 생존을 위한 닫힌 앎의 術이나, 직관은 허공처럼 무한히 열려 있고 직접적이나 지능처럼 실용적인 앎의 성질과 달라서 오히려 정신적 지혜를 단번에 알아차리는 능력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지능과 직관은 다 동물의 본능과 유사하면서 다르다. 지능은 생존의 실용적 앎에서 본능과 일치하나 지능은 열려있고 추리적이라는 점에서 본능과 다르고, 직관은 직접적 사태 파악능력이라는 점에서 본능과 유사하나 열려 있고 정신의 지혜를 알아채리는 능력이라는 점에서 본능과 다르다.

나는 베르크손의 생물철학에서 본능과 본성의 이중성을 읽었다. 동물의 경우에는 지능의 역할을 하는 본능과 직관의 역할을 하는 본성이 일치하여 하등의 괴리가 없다. 그러나 인간의 경우에 본능이 동물의 경우와 달리 콘텐츠가 별로 없어서 취약한 본능은 공작적 지능의 힘을 빌려야 생존한다. 그래서 인간의 경우에는 지식의 역할을 요구하는 본능과 지혜를 찾는 직관의 본성이 갈라진다. 라깡이 동물의 본능과 인간의 욕망이 다르다고 언명했는데, 나는 그 단초를 이미 베르크손의 생물철학에서 보았다. 인간의 욕망은 본능(지능)의 소유론적 욕망과 본성(직관)의 존재론적 욕망으로 이중화된다. 동물은 생존과 지혜의 갈등이 없으나 인간에게 그것이 있다. 그 갈등이 닫힌 기계적 본능으로 하여금 열린 지능의 소유론적 욕망과 열린 존재론적 욕망으로 변형시킨다. 마르셀 철학의 소유와 존재의 준별이 베르크손의 철학을 거치면서 본능적 지능의 소유론적 욕망과 직관적 본성의 존재론적 욕망으로 인간을 보는 눈을 키우게 되었다. 욕망론은 인간을 도덕적 당위나 기술적 인위보다 먼저 자연성의 무위적 테두리 안에서 읽어야 인간의 사실적 실상을 제대로 볼 수 있다는 불가적, 노장적 사상을 뒤에 가까히 하는 계기를 낳았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이중적인 인간의 자연성이 메를로-뽕띠의 애매모호성(l'ambiguïté)의 철학적 사유와 다시 접목되었다. 베르크손적인 본능과 본성은 인간의 자연성으로서 일자가 없으면 타자도 성립되지 않고 인지되지도 않는다는 메를로-뽕띠적인 상호얽힘(l'entrelacs)의 교차배어법(le chiasme)의 요소를 띠게 된다. 이것은 뒤에 데리다의 해체주의적 差延(la différance)의 사유를 깨닫는 데에 예비적 초석이 되었다.

   

2. 구조주의에로의 방향전환


베르크손과 메를로-뽕띠는 나에게 실존주의와 현상학을 넘어서 구조주의의 길을 가도록 종용하는 선도자의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루벵(Louvain) 가톨릭 대학은 나에게 마르셀과 메를로-뽕띠와 베르크손을 가르쳐 주었으나 구조주의에 대해서 일언반구도 언급해주지 않했다. 메를로-뽕띠와 구조주의는 다 무신론인데, 왜 메를로-뽕띠는 즐겨 강의했으면서도 구조주의에 대해서 침묵을 지켰을까? 전자는 의식과 자연과의 중간 지대를 밝히는 수정된 <cogito>의 철학이라서 새로운 신학의 기능성이 엿보였는데, 구조주의의 사상은 아예 의식의 <cogito>를 제거하고 인간의 마음을 자연의 비인격적 구조로 환원시키는 物學的 스타일이라서 루벵이 외면했던 것인지?

좌우간 구조주의 사상의 아버지인 레비-스트로스는 특이하게도 베르크손과 메를로-뽕띠를 철학적으로 친근하게 여겼다. 전자에 대해서는 그가 인류학의 지식이 전혀 없음음에도 불구하고 토템적인 사고방식을 암시했고, 후자에 대해서는 그가 현상학자임에도불구하고 구조주의적인 이항대립의 개념을 철학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여튼 구조주의는 反의식의 철학으로서 철학적 사유의 영역을 의식에서부터 무의식의 차원으로 하강시킨 업적을 남기고 있다.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는 전적으로 인식론적 장소의 이동을 결행하였다. 모든 사유는 표피적인 현상의 가변적 경험에 의존하기 보다 더 깊은 무의식의 구조가 결정하는 불변적 토대에서 필연성으로서의 진리를 인식할 것을 레비-스트로스는 제창하였다. 그로 하여금 그런 불변적 구조의 숨은 토대를 발견하게끔 자극을 준 학문이 스위스의 소쉬르와 러시아의 야콥슨(R. Jakobson)을 위시한 구조주의적 언어학자였다. 요약하자면 전자로 부터 그는 언어활동(la langage)은 어떤 구조적인 형식(la forme structurelle)이지, 고착된 실체(la substance fixée)가 아니라는 것을 터득했다. 그리고 어떤 문장의 의미도 그 의미론적 실체 속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그 문장의 구조에서 결정된다는 소쉬르의 명제를 그가 중요시하였다. 그리고 소쉬르가 개인적 의향을 전달하는 전언내용(le message)의 통시적 말(la parole diachronique)에 대해서 구조적 인식론의 차원에서 전언체계(le code)로서의 집단적이고 익명적인 언어할동의 무의식인 언어(la langue synchronique)가 불변적인 기본임을 역설했다.

이런 소쉬르의 언어학은 이미 구조주의가 철학적으로 신의 초월적 인격이나 자의식의 휴머니즘을 우상숭배로 배척하게 하는 인식론적 계기를 낳은 셈이다. 그리고 언어활동을 모든 기호체계의 관계론으로 환원되고 기호의 의미는 다른 기호들과의 차이를 나타내는 한에서만 의미화한다는 것을 소쉬르가 말함으로써 현상학(la phénoménologie)을 대신한 기호학(la sémiologie)이 새로운 학문적 방법론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모든 구조는 언어활동의 구조고, 언어활동 이전에 세계에 인식론적으로 아무것도 없었다는 명제가 제기되었다. 이 구조주의의 등장으로 기독교의 신학과 마르크시즘적 역사주의가 타격을 입었다. 야콥슨으로부터 레비-스트로스는 언어할동이 은유법(la métaphore)과 환유법(la métonymie)의 이중적 법칙으로 체계화하고 있고 이 두 법칙이 인간사고의 문화적 문법과 직결되고, 심지어 실어증의 현상에서도 이 법칙이 작용하고 있다는 구조의 토대를 알게 되었다. 은유법은 은적의 의미를 연상법으로 암시하고, 그 법칙은 불변적인 계열체(le paradigme)로 수직적 구성의 구조를 나타내고, 환유법은 인접성이 있는 것에로 의미가 미끄러지는 장소이동을 실시하고 횡적으로 결합해 나가는 성질을 지니고 있으며 현전해 있는 노출의 결합체(le syntagme)와 같다는 것이다. 레비-스트로스는 이런 언어학의 법칙들을 인류문화의 하부구조에 적용하려 하였다. 싸르트르는 개인적 실존의 자유로운 기획이 그와 그의 사회를 주형한다는 자유선택의 옹호자였는데, 레비-스트로스에게는 그런 개인의지나 자유선택은 전혀 문화와 사회의 하부구조적 틀을 구성하는데 표면의 잔물결에 비유됨직 할 뿐이겠다. 문화는 사회적이고 사회적인 것은 언어적이다. 오직 언어활동의 법칙만이 사회와 문화와 거기에 사는 인간의 사고방식을 주형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언어활동이 서로 교환하는 기호의 체계이듯이, 사회나 문화도 언어기호처럼 교환의 체계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혼도 이런 언어활동의 교환성의 법칙에 따라 내 종족의 여자를 다른 종족에게 보내고 다른 종족의 여자를 또 받아들이는 그런  族外婚(l'exogamie)의 포트라치(le potlatch)에 다름 아니다. 族內婚(l'endogamie)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것도 규칙이 있다. 즉 교차사촌간(le cousinage croisé)의 여자교환은 허용되나, 평행사촌간(le cousinage parallèle)의 통혼은 불가능하다. 최소한도의 근친상간을 기피하려는 인류의 무의식적 사고방식의 작동이다. 근친상간의 금지법(la loi de prohibition de l'inceste)이 인류 문화의 보편적 법이 된 까닭은 근친혼의 혈연을 기피하려는 생물학적 요구에 응답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고대사회는 그런 생물학적 지식을 갗출 수가 없다고 레비-스트로스가 지적한다. 언어활동의 의미화처럼 인류는 차이가 적대적 모순이 아니고 상관적인 거래의 왕복을 통하여 존재를 유지하려는 그런 집단적 무의식의 요구에 따른 다는 것이다. 즉 인류의 문화는 상관적 차이(la différence pertinente)의 관계에 다름 아니다. 이것이 결혼제도와 친족의 체계의 기본법칙이다.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 사유는 나의 철학적 사유의 길에서 결정적인 전환을 가져 오게 하였다. 그것은 그동안 내가 친숙하게 익혀왔던 모든 종류의 의식철학과 인간중심적인 휴머니즘적 사유를 멀리 하는 계기를 일깨워 주었기 때문이다. 자연을 의인화하는 자연의 인간동형론(l'anthropomorphisme)은 인간의 의식이 자연의 非의식에 대한 물질적(형이하적), 정신적(형이상적) 지배의 정당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의식의 주체가 非의식의 자연을 대상화한다. 관념론과 합리론의 주체는 대상을 의식의 이성적 판단의 적용 마당으로 여기고, 실재론과 경험론의 주체는 대상이 의식에게 이성적 판단의 잠을 깨게 하는 감각적 자극으로 여긴다. 다 이성적 판단이 서양 철학사의 핵심으로 자리를 굳혀 왔다. 의식이 이성으로 환원되고 그 이성이 휴머니즘과 자연의 인간동형론을 정당화시키는 원동력이다. 마르셀의 反 <cogito>적인 실존적 존재론적 관여의 철학, 메를로-뽕띠의 사물과 얽히고 설켜서 교섭하는 <지각의 현상학>, 인간을 자연의 생명 속으로 재조명하는 베르크손의 생철학 등이 사실상 은연중에 레비-스토로스의 구조주의적 사유와 인간의 자연동형론(le physiomorphisme)에로 서서히 나를 이끌었다고 볼 수 있다.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가 지닌 철학의 생명은 의식과 인격이 자연을 대상화하는 것을 인간의 정당한 권리로 여기게 했던 문명론을 거부하고, 오히려 자연의 구조를 인간 사고의 원형으로 섬기는 <야생적 사유>(la pensée sauvage)가 인류의 무의식적 사유의 근간이라고 여기게 했다는 데에 있다. 그 야생적 사유를 레비-스트로스는 일인칭적인 <나의 사유>(la pensée du Moi)가 아니라, 삼인칭적인 <그것의 사유>(la pensée du Ça)라고 암시했다고 보여진다. <구조주의>가 나에게 일러준 <그것>의 사유는 뒤에 나로 하여금 불교와 老莊의 사유가 바로 자연의 이법인 <그것>을 마음이 동의하고 거기에 관여하는 길과 다르지 않음을 깨닫게 해 준 촉매제가 된 것 같다.

하여튼 레비-스트로스가 말한 <그것의 사유>와 같은 야생적 사유는 인간의 사고방식이 원천적으로 자연적 사물세계의 존재방식을 알아차림과 같다. 그 존재방식이 곧 언어활동의 법칙처럼 <상관적 차이>(la différence pertinente)의 관계를 짓는 다는 것이다. 자연의 규칙은 차이와 동거가 不一而不二의 질서로서 얽혀 있고, 이런 질서가 상호성의 원리로 작동하여 자신과 타자와의 사이를 변증법적 모순 대립으로 만들지 않으며, 인류학자 모스(M. Mauss)가 발견한 사회성의 작용원리인 포트랏치(le potlatch)처럼 서로 물건의 거래로서 주고 받는 그런 교환의 질서라는 것이다. 토템의 체계도 물활론적인 종교적 신앙의 수호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저런 교환의 체계를 가능하도록 하는 야생적 사유의 일환이라고 레비-스트로스가 보았다. 이런 교환의 거래가 인류의 무의식적인 야생적 사유라고 읽는 사상은 뒤에 하이데거와 데리다의 差延(der Unter-Schied=la différance)의 철학으로 이어져서 불교의 緣起法的 사유와 노자가 말한 <有欲의 道로서의 徼>와 <竝作>, <自賓>, <繩繩>, <綿綿>, <惚恍과 恍惚>의 교차배어법 등을 철학적으로 이해하는 길잡이 역할을 했다고 여겨진다.

상관적 차이가 모순대립적 차이로 치닫으려면, 만물이 차이를 표시하는 기호가 아니고, 자아중심적 소유의식이 발동해야 한다. 非의식인 자연의 질서에는 상생과 상극의 균형만이 있지, 결코 모순대립에 의한 투쟁의 지향은 없다. 인간의 의식은 필연적으로 야생적 사유의 存在方式을 문명적 사유의 所有方式으로 바꿔 놓는다. 소유방식에는 자아의식이 반드시 개입되어 있다. 레비-스트로스는 이런 소유의식에 의한 불가피한 투쟁적 인간사회의 갈등을 상징적으로 해소시키기 위하여 신화가 등장하게 되었다고 한다. 예컨대 신하에 등장하는 코요테는 썩은 고기를 먹는 동물인데, 그 코요테는 초식동물과 포식동물과의 사이의 매개자가 되고, 또 안개나 새는 하늘과 땅 사이의 중간 매개자로, 옷은 자연과 문화와의 매개자로, 재는 수직적인 지붕이나 굴뚝과 수평적인 난로와 땅 사이의 중간자로, 남자와 여자와의 중간자로서의 양성 소유자의 모습이나, 아기와 어른의 사이를 매개하는 난쟁이 등의 모습들은 다 모순갈등을 해소하려는 무의식적 야생적 사유를 대변한다. 신화는 인간의 자연동형론적 사유방식을 알린다.

이런 신화가 야생인들의 前철학인데, 이런 야생적 사유가 철학으로 옮겨져서 표현된 것이 불교와 老子의 철학에서 등장하는 無와 空의 사유라고 여겨진다. 無와 空은 존재가 소유로 미끄러지면서 일어나는 갈등과 투쟁을 비껴가게 하기 위하여 만물의 왕래와 거래가 소유론적 거래가 아니고 존재론적 거래이게끔 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無와 空은 신화의 중간매개자의 역할과 같은 힘을 지니는 의미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老子가 그런 중간매개자의 역할을 陰陽 兩氣의 사이에 낀 沖氣라고 언명했으리라. 이 沖氣의 뜻이 비어 있음의 氣이기도 하고, 또 가운데 끼어 있는 氣이기도 하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여겨진다. 그 氣가 모든 대립모순을 상관적 이중성으로 연계시켜 주는 모체의 역할을 한다. 無가 존재로 하여금 하이데거적인 존재자나 마르셀적인 소유로 흐르지 않게 하는 불멸의 바탕이 된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無가 존재를 가능케 하는 <근거가 없는 근거>(der Ab-grund=le fond sans fond)라고 읽었으리라. 

레비-스트로스가 인류문화의 무의식적 구조를 언어활동의 구조로 읽었듯이, 라깡은 인간의 무의식을 역시 언어활동의 법칙으로 읽었다. 그는 무의식은 언어활동처럼 구조화되어 있다고 언명했다. 무의식이 언어활동을 가능케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언어활동이 무의식을 주형한다는 것이다. 라깡의 정신분석학은 미국의 생활환경에 성공적으로 적응하는 법을 도와주는 정신치료학을 아주 극렬하게 비판한다. 미국의 정신치료학은 무의식의 충동을 이기는 자아의 정립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라깡은 오히려 정반대로 자아의 자기 동일성을 전복시키는 무의식적 욕망인 <그것>(Ça)의 말인 수수께끼(le rébus)의 논리를 보려한다. 그 <그것>이 라깡에게는 주체(S)의 의미로 나타난다. 그 주체는 인격적인 자아의 주체가 아니라, 무의식적인 욕망(le désir)의 주체다. 아기가 어머니의 자궁으로부터 세상에 나온다. 엄청난 아픔과 자기 몸의 일부인 탯줄을 잘라야 하는 고통을 겪는다. 아기는 자기 몸이 이미 조각나 있다고 여긴다. 이것을 라깡은 정신병에 걸린 자들이 거울보기를 발작적으로 두려워하고, 화가들의 그림(J. Bosch. P. Bruegel)에서 정신분열자들의 조각난 몸의 그림이 그려졌다는 것을 진술한다. 라깡을 상징하는 유명한 <거울의 단계>(le stade du miroir)가 이와 유관하다.

아기는 자기 몸이 조각나 있다고 상상하였는데, 거울을 보고서 자기 몸이 성하다는 것을 보고 자기 몸에 대한 자기 동일성의 환희를 맛본다. 이것이 자기 몸에 대한 나르시시즘의 발아다. 그러나 그 온전한 자기 몸의 지각은 먼저 그 몸이 자기가 아니고 타자의 몸이라고 여긴다. 즉 생후 6-18개월의 아기는 먼저 타자를 매개로 하여 자기 몸의 정체성을 확인한다. 이것이 모든 인간관계의 이중구조의 원본인 셈이다. 자기 동일성과 타자의 이타성이 서로 혼융되어 교차적으로 나타난다. 아기가 인형을 애호하다가 갑자기 인형의 눈을 휘어 파고, 자기 또래의 아기와 잘 놀다가 갑자기 미워서 밀어 뜨린다. 자기 몸을 조각나게 한 타자에 대한 미움의 공격과 타자로부터 역설적으로 자기 몸의 성함을 지각한 아기는 타자에의 공격성(l'agressivité)과 자기 몸에 대한 나르시시즘(le narcissisme)이 뒤엉킨 애매모호한 상태로 평생 살아간다. 즉 주체는 평생 타자로부터의 인연의 끈을 끊고 살아 갈 수 없다. 거울을 통하여 타자가 곧 자기라는 것을 알게 되듯이, 아기는 자기에게 말을 건네고 웃음을 주면서 젖을 물리는 엄마가 자기와 동일하다고 상상한다. 거울의 자리에 엄마가 등장한다. 이것이 외디푸스 콤프렉스(le complexe d'Oedipe)의 시작이다. 이 콤프렉스를 성공적으로 통과하지 못하면, 아기는 영원히 사회생활에로 진입하지 못한다. 아기가 어머니와 상상적 자기 동일성을 깨고 상징의 언어활동의 세계에로 진입케 하는 것이 아버지의 법(la Loi du père)이다. 아버지의 법은 아기에게 상징적 남근(le Phallus)을 소유하지 못한 몸으로 어머니와 한 몸일 수 없다는 것을 뜻함이다. 아기는 어머니와 한 몸의 일체를 이루기 위한 멀고 먼 우회의 길을 간다. 거기서 아기는 언어활동의 세계에 참여한다.

아기의 주체인 <그것>(Ça)은 그 언어활동의 業(karma)과 같다. 무의식은 <타자의 담론>(le discours de l'autre)이고 <타자의 욕망의 욕망>(le désir du désir de l'autre)이라고 라깡은 강조한다. 거울을 통하여 본 타인의 모습이 자기 모습의 전도된 영상이고, 어머니를 통하여 자기가 어머니의 남근이라고 상상하듯이, 인간은 성장하면서 늘 타인의 담론을 통하여 자기의 나르시시즘을 갖고 또 타자에 대한 적대감을 갖는다. 타자에 대한 적대감은 타자로부터 인정감을 쟁취하려는 소유욕과 다르지 않다. 각자는 타자가 부러워하는 욕망의 대상이기를 욕망하므로 각자는 늘 타인의 욕망의 담론에 의하여 길들여진다. 타자의 말이 곧 자기의 자아가 되는 그 사이의 지역(a-a')이 무의식의 경계이다. 각자의 무의식은 그 경계선의 바깥을 넘어 설 수 없고 또 통과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타인의 말이 나의 무의식을 형성했는데, 그 언어활동은 타인과의 교통을 위한 것인데, 그 언어활동이 오히려 타인을 이해하는데 방해를 가져 온다. 왜냐하면 나의 무의식에 이미 입력된 타인의 욕망이 나르시즘을 형성해 놓았기에 새로운 지평을 향한 해방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생활이 곧 무의식의 담론의 자궁인데, 그 무의식의 자궁이 이미 사회생활의 다른 대화를 거의 귀머거리의 대화로 만들어 버린다. 인간은 그가 무의식에서 듣고 싶어 하는 것만 통과시킨다. 이것을 말의 체(le crible)라고 부른다. 라깡의 구조주의에서 이성적 대화의 담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모든 인간이 무의식의 주체인 <그것>의 지배를 받고 있다면, 모든 이는 다 편파적이고 부분적인 담론의 제약을 벗어 나지 못한다. 인간은 사회생활의 共同業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불교의 業感緣起說과 라깡의 구조주의가 유사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런 업감연기설의 구조 안에서 유토피아가 없는 현실을 직시하면서 지나친 이기적 나르시시즘과 배타적 공격성의 중간 쯤에서 인간의 잠정적 구원인 중도의 상징을 선택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라깡을 말한다. 나는 이 라깡의 <그것이 말한다>(Ça parle)가 하이데거의 <그것이 말한다>(Es spricht)와 혼동되어서 처음에는 서로 유사한 것이 아닌가 오해했다. 그러나 뒤에 그 두가지가 서로 상이한 인간 무의식의 언어활동으로서 차이가 나지만 동거해 있는 인간의 자연성의 두가지 욕망에 해당된다는 것을 나는 자각했다. 즉 라깡의 것은 자연성인 무의식의 소유론적 욕망인 본능의 차원이고, 하이데거의 것은 자연성인 무의식의 존재론적 욕망인 본성의 차원이라고 깨닫게 되었다. 라깡의 욕망론은 나에게 베르크손의 본능론과 결부되어 마르셀이 말한 소유론적 사유방식과 만나는 계기를 이루었다. 소유론적 본능의 욕망은 타동사적 욕망으로서 좋은 것을 바깥에서 취득하려고 타인들과 배타적으로 투쟁하는 장악적 사고방식을 뜻하고, 존재론적 본성의 욕망은 자동사적인 욕망으로서 좋은 것이 자기 안에 이미(déjà) 그리고 언제나(toujours) 있어 왔음을 알아차리고 그 좋은 것을 꽃피워서 타인들에게 이타적으로 시여하려는 그런 보시적 사고방식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마음은 좋은 것을 좋아하는 기호에 다름 아니다. 이런 생각은 불교의 유식학의 가르침과 통하고, 특히 들뢰즈(G. Deleuze)가 스피노자의 윤리학을 해석하면서 기호의 윤리학(l'éthique)은 선의지의 도덕학(la morale)과 다름을 강조한 것에 크게 영향을 받기도 하였다. 스피노자는 인간은 어떤 것이 善이기에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좋아하기에 善이라고 여긴다고 갈파하였다.

소유론적 본능과 존재론적 본성은 좋은 것을 좋아하는 점에서 유사하나 전자는 타동사적이고 장악적이며, 후자는 자동사적이고 시여적인 마음의 기호라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이것은 라깡과 하이데거의 사상을 비교함에서 얻어진 결론이다. 그래서 이런 결론에 힘입어 나는 불교의 華嚴사상과 禪사상에서 말하는 衆生心이 곧 如來心이라는 말의 뜻을 철학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본능의 소유론과 본성의 존재론은 서로 다 같이 이익을 겨냥하는 자리인데, 마음의 방향을 달리 한다고 하겠다. 두 사상가가 다 <그것이 말한다>라는 공통의 말을 말한 배경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이 두 사상가에게 다 언어활동을 뜻한다. 이기배타적인 이익과 자리이타적인 이익이 중생과 여래의 마음의 행로다. 더구 프랑스의 언어학자인 벵베니스트(E. Benveniste)가 소유동사(Avoir)가 타동사임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으로 결코 피동형으로 쓰여지지 않는 다는 사실을 설명하면서, <소유하다>의 의미가 事行동사가 아니고 狀態동사의 뜻을 함의 하고 있기에 존재동사(Etre)와 대단히 혼동되어 쓰이고 있다는 것도 저런 철학적 결론을 이끄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본능의 소유와 본성의 존재는 메를로-뽕띠가 말하는 얽힘장식의 교차배어법과 같은 의미를 띤다고 여긴다. 元曉가 生滅의 不覺과 眞如의 覺이 서로 一心二門의 새끼꼬기를 한다고 말한 것과 같은 의미겠다.

   

3. 데리다의 해체주의와 無의 존재론으로 가는 길


구조주의와 데리다는 내가 루벵대학에서 익힌 철학이 아니다. 순전히 독학의 결정체였다. 처음에 데리다의 사상이 너무 생경해서 루벵학생 시절에 그의 가장 쉬운 책인 󰡔목소리와 현상󰡕(La Voix et le phénomène) 마져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구조주의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이해가 그에 대한 지적 접근을 가능케 했다. 데리다의 해체철학은 레비-스트로스가 말한 의식철학의 인간동형론을 파괴시키기 위함이라고 여겼다. 의식과 자아중심의 구성주의를 지워서 모든 존재자적인 실체론과 명사론을 파괴하는 것이 새로운 철학의 길이라고 데리다가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런 의식철학, 자아철학은 그가 비판하여 마지 않았던 말중심주의(le logocentrisme), 소리중심주의(le phonocentrisme), 존재론적 현존철학(la philosophie de présence ontologique), 존재신학(l'onto-théologie), 택일과 개념적 결정(le choix et la décision conceptuelle)의 역사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데리다는 구조주의의 이항대립적인 상관적 대대법(l'opposition pertinente)이 정태적인 기계적 수준에 머물고 있기에 아직도 본격적인 이항 사이의 역동적 거래의 차원으로 구체화되지 못했다고 진단했다. 그래서 그는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를 떠난다. 그리고 그는 레비-스트로스가 아직도 역사의 유토피아적인 환상을 온전히 버리지 못했음을 비판하면서, 그런 환상에의 집착은 여전히 그가   역사의 현존적 시간의 실재를 믿고 있다는 것이라고 비평한다.

데리다는 말소리중심주의(le logo-phonocentrisme)에 대하여 <문자학적 사유>(la la pensée grammatologique)를, 존재론적 현존의 철학에 대하여 <차이와 원흔적의 사유>(la différence et la pensée d'archi-trace)를, 존재신학에 대하여 <差延과 보충대리의 법>(la différance et la loi de supplémentarité)을, 그리고 택일과 개념적 결정의 논리학에 대하여 <이중성과 결정불가능성>(la duplicité et l'indécidabilité)의 反논리를 각각 제의했다. 이런 다양한 수식들은 다 같은 해체철학의 사유를 다르게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말소리의 의미는 서구 사상사에서 늘 영혼의 자기공명의 현존을 노래하기 위한 진리의 매체로 여겨왔다. 정신의 자기동일성을 알리는 의미는 진리의 말과 그 소리의 내적 공명의 화음과 다른 것이 아니다. 그래서 진리는 허위와 한자리에 있지 않고, 그 소리는 어떤 간격의 불협화음을 용인하지 않는다. 신중심, 영혼중심. 진리중심은 다 내면성의 자기 동일성을 찬양하는 동일성의 철학이다. 그러나 데리다는 그런 자기 동일성이 하나의 허구임을 말한다. 마르셀의 소유와 존재의 대립이나, 메를로-뽕띠의 <살>의 교차배어법이나, 베르크손의 본능과 직관(본성)의 이중성이나, 레비-스트로스의 야생적 사유의 상관적 차이나, 라깡의 거울단계의 이중성이나 다 이타성이 없는 동일성이 결코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즉 같음(le même)은 다름(l'autre)과 함께 성립하고 존재하는 한 쌍의 관계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같음은 다름의 다름(l'autre de l'autre)이고, 다름은 자기와 다르게 같음(le même autrement que soi)에 지나지 않는다. 

말과 소리의 철학은 전통적으로 동일성(l'identique)을 중시했으나 문자(l'écriture)는 차이(le différentiel)를 이미 그린다. 일반적으로 한국에서 이 문자의 뜻을 글쓰기로 옮기는 경향이 있으나, 저것은 글쓰는 행위를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씌어진 것에 더 가깝다. 일체의 씌어진 모든 표지(l'indice)가 데리다의 문자라고 읽어야 하겠다. 그러므로 문자는 단순히 글자를 말하는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종류의 씌어진 흔적(la trace)의 뜻을 담고 있다. 흔적으로서의 문자는 이미 그 자체 차이를 분비한다. 종이 위에 무심코 그으진 사선은 이쪽과 저쪽을 갈라 놓으면서 이중화시킨다. 도장의 음각과 양각은 차이에 의한 한 흔적의 이중성에 불과하다. 이런 이중성이 야누스의 얼굴처럼 모든 시작에 이미 새겨져 있다. 따라서 일점 근원의 순수성은 현존의 신화에 불과하다. 이것이 유명한 문자학적 사고방식이다. 모든 출발은 이미 이중성으로 오염되어 있다. 음각은 양각의 다름이고 양각은 음각의 다름이다. 그러나 동시에 성립한다. 이런 점에서 각각은 다 타자의 흔적에 불과함으로 선험적인 흔적의 사고를 말하기 위하여 데리다가 원흔적이란 표현을 썼다. 음각은 양각을 보충대리해 주고 差異 속에서 延期的 상관성을 주고 받기 때문에 이런 묘한 역동성을 데리다는 差延(la différance)이라는 이름으로 자기의 사유를 알렸다. 이 차연적 사유는 이미 하이데거가 󰡔동일성과 차이󰡕(Identität und Differenz)에서 명명한 차연의 뜻인 <der Unter-Schied>의 용어와 다르지 않다. 사실상 데리다가 하이데거를 존재론적 현존의 철학자로 비판한 것은 그가 전반적으로 하이데거를 잘 못 읽었던지, 아니면 의도적 차이를 표시하기 위한 욕심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하여튼 나는 데리다를 통하여 노장사상과 불교사상을 철학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계기를 터득했고, 또 오랫동안 난공불락이던 하이데거를 풀이할 수 있었다. 그는 나의 철학적 행정에서 가장 큰 전환기를 제공해 준 사상가였다. 지나가면서 언급하자면 하이데거를 실존주의자나 현상학자로 평가하기 보다 포스트-모던적인 해체주의자로 해석해야 옳다고 생각한다. 다시 데리다를 말한다. 差延의 사유는 불교적 연기법의 사유와 다르지 않다고 여겨지고, 그것은 또 노자가 이미 말한 <有欲의 徼>로서 만물의 존재방식으로서의 상호거래의 오감을 언급한 것과 상통한다고 생각한다. 또 이런 차연의 법칙은 莊子가 말한 放生之說과 무엇이 다를까? 이런 차연의 법을 데리다는 이중긍정(et-et)과 이중부정(ni-ni)의 불가결정의 反논리로 표시했다. 이중긍정은 데리다가 말한 파르마콘(le pharmakon)처럼 약(le remède)이면서 동시에 독(le poison)인 존재의 非실체적, 非자가성적 자기 동일성의 부정을 가리킨다. 그래서 파르마콘은 이미 같음과 다름을 어떤 존재방식으로 동시에 지니고 있는 이중긍정의 본질을 띤다. 그래서 이런 이중긍정은 노자가 말한 玄의 反개념적 본질과 다르지 않다. 존재가 이중적 요인들의 연루법과 같으므로 그 존재는 상호 흔적의 관계 묶음으로 읽어야 함으로 역시 노자가 말한 <恍/惚>과 <惚/恍>의 교차배어법의 표현과 다르지 않다. 약이 약인 것만이 아니고 독도 독인 것만이 아니므로, 그 이중긍정은 또한 안으로 이중부정의 사고방식을 힘의하고 있다. 그래서 데리다는 파르마콘의 이중긍정을 또한 코라(la chora)의 이중부정과 별개의 것이 아니라고 언명했다. 그 코라의 이중부정은 파르마콘의 이중긍정이 실질적으로 그 이중긍정을 초탈하는 無의 공간과 같음을 뜻한다. 데리다가 비록 하이데거의 존재론을 현존의 철학이라고 비판하면서 존재론 대신에 흔적론을 제기했으나, 하이데거의 경우에 존재가 이미 이중성의 흔적에 다름 아니므로 데리다의 문자학도 궁국적으로 有/無의 관계로서 이 세상을 읽는 필연적 사실론의 존재론인 것으로 보인다.

데리다의 철학이 하이데거를 다시 보게 하고 노장과 불교의 유식학과 화엄학을 다시 읽도록 함 점에서 나의 프랑스 현대철학의 사유 행정은 데리다의 해체철학으로 그 은택의 절정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마르셀의 反 소유론과 反 <cogito>의 철학이 나로 하여금 감각과 신앙의 관여를 깨닫게 했는데, 그것이 나에게 가톨릭적 신앙철학에서 불교적 禪의 수행철학으로 이어지도록 했다. 메를로-뽕띠의 현상학으로부터 나는 마르셀적인 反의식의 철학에 이론적 타당성을 더하게 해 준 가르침을 입었고, 베르크손으로부터 인간을 생동감있게 이해하기 위하여 자연의 생물학적 본질을 떠나서 불가능함을 익혔다. 이런 反의식, 反 cogito의 철학이 나를 구조주의의 길로 안내했다. 구조주의로부터 나는 본격적인 인간의 자연동형론적인 物學을 배웠다. 야생적 사유가 무의식적 사유와 다르지 않음을 나는 레비-스트로스와 라깡으로부터 차근차근 배웠다. 그리고 역사의 흐름도 변증법적인 전개가 아니라 시대의 일반적 무의식적 인식의 틀 아래서 인식되어야 함을 알게 되었다(푸꼬). 그래서 무의식의 문법이 인간 사유의 불변적 하부구조임을 배운 나는 데리다의 해체철학을 통하여 그것이 인식의 수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불변적인 사실로서의 有無의 道에 불과함을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老莊의 有無의 道와 불교의 色空의 수행에로 나아갔다. 아울러 데리다를 통하여 하이데거의 사유가 무엇인가를 간접적으로 시사받는 계기를 터득했다는 것도 밝히고 싶다. 오늘의 나를 철학적으로 있게 해준 것은 거의 프랑스 현대 철학의 어떤 흐름으로부터 익힌 자기화의 길이라고 고백하는 것이 결코 과장이 아니라고 여겨진다.























【발표2】 현대 프랑스 철학의 현상학적 흐름


불투명성으로 본 프랑스 현상학

  

                                          조광제(철학아카데미)



1. 근대 모더니즘의 보편적 명증성에의 열망


데까르뜨가 근대 모더니즘 철학의 초석을 놓았을 때, 그 초석의 전제는 무엇이었는가? 명석판명한 인식이야말로 이성을 가진 학인이 학적으로 믿고 따를 수 있는 진리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내세우고, 부르노가 무한 우주를 말함으로써 우주의 중심을 삭제하다 화형을 당하고, 갈릴레이가 망원경을 발명해 목성의 달을 발견함으로써 전혀 엉뚱한 중심을 도는 별이 있음을 확인한 뒤, 과학자인 데카르트 역시 이제까지 사유를 지배해 온 어두운 심연을 지닌 신의 뒷모습을 더 이상 인정할 수 없다고 하는 대변혁의 시대를 조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신학적-형이상학적인 이성이 아니라 실증과학적 이성을 지닌 자들에게 걸맞는 학의 체계가 필요하다고 여긴 데까르뜨는 기어코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나 ‘ego cogito'를 더없이 명석판명한 관념임과 동시에 모든 존재, 특히 인간의 삶을 규정하는 가장 근본적인 원리로 선포했다.  

인간의 손아귀로, 나아가 나의 사유의 손아귀로 존재 전체를 거머쥐고자 하는 바람으로 그렇게 근대 모더니즘은 시발한 것이다. 그 결과 인간의 사유는 보편적으로 존재를 끌어당기는 거대한 힘으로 인식되었다. 명증성을 바탕으로 한 보편적인 사유, 그것은 결국 모든 존재를 수학적인 함수 관계 속으로 집어넣음으로써 완성된다는 사유를 낳게 된다. 데까르뜨가 공간의 사상(事象)을 함수식으로 바꾸어 계산할 수 있는 해석기하학을 개발한 것, 뒤이어 뉴턴과 라이프니츠가 나란히 미적분학을 안출해 순간의 변화율마저 꿰뚫어 계산할 수 있는 길을 연 것, 비록 실패했으나 라이프니츠가 모든 인간의 사유를 간명하게 표현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이진법적인 보편적인 기호 체계를 확립하고자 한 것 등은 바로 이러한 명증성을 바탕으로 한 보편적인 사유의 실질적인 모습이었고, 그 결과 근대과학 혁명이 이루어졌다.

18, 9세기를 거치면서 조지 불, 프레게, 칸토어 등에 의해 인간의 사유와 평행하게 모습을 드러내 보이는 언어의 세계를 논리적인 각종 인공 언어와 연산자로 계산해 내어 프로그램화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게 된 것1)도 명증성을 바탕으로 한 보편적인 사유 체계로써 존재를 거머쥐고자 하는 열망을 구체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결국에는 이러한 열망은 튜링과 폰 노이만을 거쳐 오늘날 현대인의 삶을 거머쥐고자 하는 컴퓨터를 중심으로 한 디지털 혁명으로 이어지고 있다. 외삽법적이긴 하나 그 결과 30년 뒤 쯤이면 인간과 비등한 지능을 지닌 로봇이 나타날 것이고 50년 뒤 쯤이면 로봇들이 모여 “열등한 인간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회의를 하게 될 것이라고 말할 지경이 되었다.1)

그런 점에서 현대는 여전히 모더니즘적인 기획의 연속선상에 있다.


2. 독일의 현상학―훗설과 하이데거


그런 점에서 자기소여성(Selbstgegebenheit)이라는 명증성을 내세워 엄밀한 학으로서의 철학이라는 이념을 현실화하고자 했던 초기의 훗설은 정확하게 모더니스트였다. 비록 ‘엄밀함’(Strengeheit)이 ‘정밀함’(Exaktheit)과 구분된다고 하여 수학-과학적인 명증성과 자신의 철학적인 명증성을 구분하려 했다 하더라도 인간 사유의 손아귀에 존재를 넘겨주고자 한 열망에 있어서는 똑같기 때문이다.

나중에 메를로-뽕띠가 “환원의 가장 중요한 교훈은 완전한 환원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하게 만든 훗설의 선험적-현상학적 환원이라는 것도 결국에는 자기소여성이라고 하는 명증성의 영역을 찾아들어가는 조치에 다름 아니다. 그 어떤 것에도 현혹되거나 속지 않으려는 그 지독한 진리에의 열망이야말로 철학자들에게는 파르마콘이다. 

훗설의 현상학이 내세운 의식의 구성적 지향성은 존재로부터 어두운 심연을 제거하는 결과를 낳았다. 훗설에서 의식은 사물에게서 일체의 내용적인 즙액을 빨아들여 사물을 본질 필연적으로 의식상관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에 사물 자체라고는 단적인 대상(Gegenstand schlechtin)이라 불리는 극단적인 영점(Null Punkt)에 불과한 것으로 처리되었다. 말하자면 사물은 의식의 강력한 삼투압에 의해 완전히 발가벗겨진 채 점적인 껍질로 남은 것이다. 그 대신 의식은 역동적인 자기 완결성이라는 모순을 끌어안고서 제 스스로에게서 제 스스로의 발생적인 역사를 거듭하면서 계속 두툼해지는 ‘창 없는 모나드’로서 자기 필연성과 절대성을 확보했다. 직각적인 현전을 강조한 ‘원리 중의 원리’에서 혹은 무전제성의 원리에서 이는 이미 예고된 것이었다. 

그러나 훗설을 끝내 괴롭힌 것은 몸(Leib)이었다. 몸이 없이는 순수의식의 내실적 영역인 질료가 주어질 수 없었고 아울러 사물들의 숨겨진 연결망을 끌어들이는 그물인 지평이 성립할 수 없었다. 몸은 의식과는 달리 본성상 자기소여적인 명증성을 노현하지 않는 것이고, 몸은 여느 사물과는 달리 의식의 삼투압에 빨려 들어오는 것이 아니었다. 이를 그가 몰랐던 것은 아니다. 그는 몸이 선험적(transzendentale) 내지는 순수 의식이 경험적인 주체로 변환하는 핵심 통로임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애써 그가 몸에 대해 근원적인 존재론적 지위를 부여하지 못한 것은 무슨 까닭일까? 자기소여성에 의거한 명증성의 영역 즉 순수 의식의 영역을 향해 이미 너무 멀리 가버렸기 때문이다. 이는 그가 생활세계적 환원을 통해 지각적이고 문화적인 생활세계를 정초하면서 끝내 그 기반으로서 선험적(transzendentale) 주체성으로서의 순수 의식을 포기하지 못한 것을 보아서도 잘 알 수 있다.

이러한 훗설의 명증성 즉 밝음을 지향하는 철학은 어두움 특히 죽음이라는 완전한 타자에 휩싸여 있는 삶의 현실을 결코 부정하지 못하는 철학자들에 의해 공격을 받는다. 첫 번째 공격자는 하이데거였다. 그는 세계-내-존재, 자신의 존재에 대해 물음을 던지면서 ‘거기에서’ 살고 있는 현존재, 죽음으로부터 오는 비지향적인 불안에 시달리는 인간 현존재, 세계 속에 있으면서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신경을 쓰는 인간 현존재(Sorge), 선구적인 결단을 하지 않으면 시간을 의미 있게 살아낼 수 없는 인간 현존재, 결국 인간이란 자신을 포함해 존재하는 존재자(Seiendes)들을 통해 가끔씩 간접적으로 얼굴을 드러내는 존재(Sein)라고 하는 어두운 심연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는 존재자임을 설파한다. 은폐와 탈은폐를 거듭하는 존재와의 결투 및 화해. 그 속에는 근원적인 불투명성이 가로놓여 있다. 하이데거의 철학적인 공적은 신조차 어찌 할 수 없는 바로 이러한 존재의 불투명성이 얼마나 근원적인가를 드러낸 데 있다. 그가 말하는 무는 바로 이러한 존재의 불투명성을 달리 부른 이름에 다름 아니다. 놀람과 당황함, 고통과 고뇌, 부조리와 모순, 끝없이 신경 씀, 마침내 내버려둠 등은 결국 존재의 불투명성을 견디고 이해하기 위한 인간 현존재의 여러 얼굴들이다. 하지만 인간의 그러한 얼굴들은 존재의 불투명성을 환하게 드러내어 투명하게 만드는 것과는 본래 거리가 멀다. 그저 존재의 불투명성을 살아내는 기법일 뿐이다.

그러나 하이데거에서조차 사물은 우선 존재자라는 이름으로 또는 즉자존재라는 이름으로,  또는 ‘손앞의 존재’(Vorhandensein)라는 이름으로, 나아가 인식(Erkennen)의 확연한 대상이라는 이름으로 존재의 불투명성을 향한 통로로서의 자격을 완전히 상실하고 있다. 하이데거가 존재의 불투명성을 본 것은 인간 현존재의 전반적인 심리에서 느껴지는 한계선에서였던 것이다. 이는 하이데거가 훗설이 괴로워했던 몸의 문제를 완전히 도외시한 것과 직결된다. 요컨대 하이데거는 존재의 불투명성의 근원을 인간을 비롯한 존재자 전반을 가로지르는 존재론적인 원리인 사물성에서 보지 않았다. 기초존재론에서 존재에 대한 놀라움을 인간 현존재의 존재에 대한 놀라움으로 바꾼 조치를 벗어나지 못한 나머지 전회를 거쳐 후기에 이르러 설사 인간을 벗어나 존재로 나아갔다 할지라도 그 초월적인 이행은 인간만의 고유한 권역을 벗어난 것에 불과했다. 벗어남 역시 결국에는 인간중심적인 것이라는 이야기다.


3. 프랑스의 현상학―마르셀, 싸르뜨르와 메를로-뽕띠 그리고 레비나스와 데리다


훗설과 하이데거라고 하는 독일 현상학자의 두 거두의 새로운 사상은 프랑스를 강타한다. 두 사람의 영향을 받은 가장 걸출한 인물은 당연히 싸르뜨르다. 어린 시절 일찍이 스스로를 데까르뜨주의자라고 생각했던 싸르뜨르는 훗설을 현대적인 데까르뜨주의자라고 믿었을 것이다. 특히 1929년 파리에서 있었던 훗설의 강연은 이러한 생각을 더욱 강하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싸르뜨르는 훗설의 뒷면을 치고 들어가 오히려 극단적인 데까르뜨주의자가 되고 만다. 그것은 데까르뜨주의가 명증성과 자아 중심에서는 훗설로 향하는 경로이지만, 또 하나의 데까르뜨주의는 정신과 물질 이분법을 철저히 견지하는 데서는 반(反)훗설적인 경로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훗설의 현상학적인 의식 이론 즉 모든 의식은 어떤 것에 대한 의식이라고 하는 지향성 및 본질직관에 입각한 의식 이론에 감명을 받은 싸르뜨르는 특히 본질이 곧 현상이라고 하는 훗설의 이론을 환영한다. 그러나 곧 이어 현상의 존재와 구별되는 존재의 현상을 지적해낸다. 그것은 마치 하이데거가 존재자와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를 적시해내는 것과 같다. 그가 본 존재의 현상은 현상의 존재와는 달리 의식의 뒤를 감고 도는 일종의 검은 구멍이다. 『존재와 무』를 발간하기 5년 전에 발간된 『구토』는 이미 이러한 검은 구멍으로서의 존재 현상을 문학적으로 예고하고 있다. 『존재와 무』에서 권태와 구역질과 같은 직접적인 방법에 의해 이 존재의 현상이 노현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이는 명확하다. 

 싸르뜨르의 존재 현상이라는 개념은 훗설과 훗설에 대한 하이데거의 공격을 동시에 의미 있게 받아들여 자기 나름으로 통일시킨 것이다. 점액질의 끈끈한 이질성을 지닌 사물에서 존재의 현상을 목격했을 때 그것은 바로 존재의 불투명성이었다. 싸르뜨르는 존재의 불투명성을 말하되 하이데거에 비해 훨씬 더 직접적이고 구체적이다. 그런 점에서 훗설적이다. 불투명함이 불투명함 그대로 드러남을 중시한 것이다. 

싸르뜨르가 훗설의 면모를 더욱 적극적으로 이어받는 대목은 의식 이론에서다. 훗설은 의식의 실체성을 파괴했다. 대상에 걸려 있으면서 대상 영역을 완전히 포섭하는, 실체보다 더 깊은 차원의 절대적인 흐름으로서의 의식을 구축했기 때문이다. 싸르뜨르는 훗설의 비실체적 의식론을 극단화한다. 의식은 의식된 내용으로 가득 차 있으나 그런데도 그렇게 가득 차 있는 의식 내용이 자신이 아니라는 부정을 수행하는 이른바 무로서의 근본 의식을 설립한다. 구토를 일으킬 정도로 존재가 의식을 치고 들어오는 것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그래서 절대적인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의식은 부정과 초월 작용 그 자체인 무로 무한정 물러나야 하는 것이다. 완전히 탈인간적이어서 철저히 불투명한 점액질인 사물인 존재, 역시 완전히 탈인간적이어서 철저히 투명한 의식인 무. 이렇게 해서 싸르뜨르는 극단적인 데까르뜨적인 이분법 존재와 무의 완전한 분리를 일구어낸다. 물론 그 사이에서는 선반성적인 코기토, 응시, 타자, 대자적인 몸, 각종 심리적인 사실 등이 다양한 관계와 양태로 현상한다.

싸르뜨르의 존재론은 훗설의 존재론을 완전히 뒤집어 놓은 셈이다. 훗설에서 영점인 단적인 대상으로서의 사물은 절대적 의식류로서의 의식의 수중에 완전히 포섭되었다. 의식 내에서의 사물이고, 의식 내에서의 의미고, 의식 내에서의 생활세계였다. 그런데 싸르뜨르에서 의식은 텅 빈 것 이상의 극단적인 영점으로서의 무이고, 사물은 현상의 존재 너머 존재의 현상을 통해 열리는 거대한 불투명함의 지대이다.  

싸르뜨르 존재론의 공적은 훗설이 배제해버린 존재의 불투명함을 되살리되 하이데거와는 달리 사물의 근본원리로 끌어들여 지상으로 끌어내렸다는 데 있다. 하지만 존재의 불투명함과 직접 대결하지 않으려는, 그렇게 대결하다가는 주체의 본성인 자유가 손상될 수밖에 없다는 강박에 의해 무로서의 절대적인 부정과 초월의 주체를 내세워 다시 데까르뜨식의 허공의 주체(sujet du survol)를 부활시켰다는 데서 난맥상을 드러낸다.

주체마저 불투명할 수는 없는가? 불투명한 주체로서 불투명한 사물의 세계로 진입해 들어갈 수는 없는가? 그럼으로써 오히려 불투명함의 농도를 낮추고 그렇게 낮추어진 농도의 불투명함을 삶의 근본 형태로 삼아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열 수는 없는가? 아니 아예 불투명함과 명증성 내지는 투명함의 경계를 지우고 그 사이에서 끊임없이 열리는 파동의 세계를 만끽할 수는 없는가? 이러한 질문에서 메를로-뽕띠의 몸 현상학이 설립된다.

분명 내 속에서 세계가 열리건만 내 자신 역시 세계 속에서 열리는 것이기에 내 속에서 열리는 세계 역시 세계 속에서 열리는 세계라는 것. 따라서 내 속에서 타자가 열리지만 나 역시 타자 속에서 열리는 것이기에 나의 세계는 나의 세계로 존립하고, 타자의 세계는 타자 자신의 세계로서 충분히 존립하지만, 결국 나와 타자는 공동의 세계에서 존립한다는 것. 이러한 어쩌면 상식적인 존재론을 철학적으로 떠받치기 위한 유일한 방책은 세계 속에서 세계와 이미 다양한 수준의 다양한 형태의 의미를 주고받는 살아 있는 몸을 삶의 주체로 삼는 길밖에 없다는 것이 메를로-뽕띠의 입장이다.

서로 뒤섞여 있어 감추어짐으로써 진정으로 드러나는 나와 세계, 그리고 둘의 관계. 이제 명증성 내지는 투명성에의 열망은 메를로-뽕띠에게서 거세되고 만다. 아울러 완전한 불투명성 역시 제거된다. 싸르뜨르에게서 보였던 것처럼 명증성 내지는 투명성과 완전한 불투명성은 일종의 일란성 쌍생아이기 때문이다.

메를로-뽕띠가 몸 현상학을 구축하는 데 있어서 마르셀에게 기대는 대목이 많아 보인다. 체화(incarnation), 참여로서의 지각, 상황에 처한 존재, 실존의 지표로서의 몸, 작용성으로서의 감각, 몸 지각의 신비, “나는 내 몸이다.”라는 몸 자아 내지는 몸 주체에 대한 언명은 마르셀로부터 받은 것으로 보인다. 특히 몸의 불투명성에 대한 메를로-뽕띠의 강조는 주위에 어둠을 거느리고 있는 밝은 원으로서의 의식을 중심에 놓는 데서 이제 나의 몸인 어둠을 중심에 놓여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마르셀의 일종의 비의적인 ‘나의 몸’에 대한 입장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러한 마르셀로부터 이어받은 몸에 관한 이야기들은 아론 거비취로부터 소개받아 천착한 게쉬탈트 이론의 원리, 베르그송으로부터 이어받은 습관 이론, 훗설로부터 이어받은 지향성 개념, 하이데거로부터 받아 변형한 ‘세계에의 존재’(être au monde) 등의 당시 강력한 힘을 발휘하던 굴지의 개념들과 혼연히 결합되면서 메를로-뽕띠 특유의 몸 현상학으로 전개된다.

메를로-뽕띠의 몸 현상학이 특별히 비판해 마지않는 지성주의적인 반성 철학은 당연히 반성적 의식을 바탕으로 한 코기토적 명증성을 참된 인식의 근거로 내세운다. 메를로-뽕띠가 내세우는 세계 내지는 상황에 이미 뿌리를 내리고 있는 참여의 인식론은 인식 주체는 본래 체화된 존재로서 이미 선인칭적인(prépersonnel) 익명의 주체로서 그 자체 불투명성을 바탕으로 한 것임을 강조한다. 불투명한 주체에서 만약 투명한 인식이 이루어진다면, 그 인식은 뭔가 추상적으로 왜곡된 것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유하지 않기 위해 사유한다는 사유의 자기공격성을 반성함으로써 다시 지향하게 되는 메를로-뽕띠가 권유하는 초사유(surpensée)는 그 자체 이미 불투명한 세계 속으로 순조롭게 잠입하기 위한 몸이 하는 사유를 추종하는 철학적 사유다.

이제 메를로-뽕띠에서는 사유마저도 본성상 불투명함을 전제로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불투명한 사유, 이는 명석판명함을 생명으로 하는 데까르뜨적인 철학적 사유를 정면으로 공격함으로써 근대의 모더니즘적 사유 체계의 기획을 뿌리에서부터 뒤엎는다. 결국 메를로-뽕띠는 명증함을 추구하는 지성적 의식으로써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감각적 파동의 존재론즉 살 존재론으로 이행한다. 살은 존재의 원소이자 원형으로서 주체와 대상의 무한정한 직접적 환위와 교환을 가능케 하는, 그 자체 감각하는 자와 감각되는 것으로 아직 분화되지 않은 감각 덩어리(masse du sensible)로 정위된다. 양자 역학에서 말하는 에너지 덩어리인 양자(量子)를 존재론적인 차원에서 감각 덩어리로 해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살과 등치되는 감각 덩어리는 무한정한 파동의 덩어리이고, 이 무한정한 파동의 덩어리는 그 자체 점액성이 강한 두께로 응집되어 흐르는 것이다. 

레비나스의 현상학은 얼굴(visage)에서 나타나는 무한정한 불투명함에서 무한자로서의 타자를 읽어내는 데 있다. 얼굴이야말로 실체와 대결하는 현상학적인 정신을 잘 표현하는 개념이다. 레비나스는 근대 모더니즘적 기획에서 발명된 데까르뜨적인 주체를 소유를 통해 이기심을 누리고자 하는 주체로 해석함으로써 데까르뜨의 유아론적인 구도를 윤리적인 차원으로 끌어올려 공격한다. 서로 이기적인 주체로서 서로를 바라볼 때, 내가 바라보는 타인의 얼굴은 그 자체 결코 소유의 대상이 없는 근원적인 저항을 발한다. 그러나 레비나스는 그 저항은 타인이 나에게 전혀 무방비한 상태에 놓여 있을 때 발휘된다고 말한다. 철저히 유린되었을 때, 완전한 굴욕을 드러낼 때, 끝없는 비참함에 빠져 있을 때, 타인의 얼굴은 오히려 절대적인 고귀함으로 나를 꼼짝하지 못하게 만들어 이기적 소유자로서의 나의 주체를 물음의 늪으로 빠뜨려 나의 소유권을 정면으로 부인한다는 것이다. 그때 타인의 얼굴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위에 있는 자로서 나에게 다가와 나를 깨우치고 소유의 주체에서 환대의 주체로 나를 변형시킨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야곱의 신은 죽었는가? 하고서 외치는 절체절명의 절망을 체험한 레비나스의 입장을 강하게 옹호하고 싶어진다. 극단적으로 비참한 나머지 완전히 사라져버린 타인의 얼굴에서 오히려 무한정하게 강력한 얼굴을 읽어낼 줄 알았던 레비나스의 역설적인 사유의 힘은 어쩌면 그의 신이 주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명증적인 소유의 주체의 시선으로 볼 때 완전히 불투명한 타인의 얼굴이 위로부터 오는 명증한 저항으로 느껴졌는지 모른다. 그러나 레비나스는 타인의 얼굴이 지닌 무한정한 불투명함을 무한자인 신적 타자의 불투명함의 계시로 바꾸어 놓고 말았다. 이러한 레비나스의 철학은 근대 모더니즘에 대해 이중적인 태도를 지닌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만약 타인의 얼굴에서 신의 얼굴을 보았다면 그래서 인간의 존재를 그 자체로 신적인 존재로 탈바꿈시킨 것이라면, 그것은 근대 모더니즘이 신의 위치에 인간의 위치를 올려놓은 것과 동형적이다. 만약 타인의 얼굴을 신의 얼굴에 대한 예시 내지는 통로로 보았다면, 그것은 방식을 달리하면서 전-모더니즘의 정신 즉 중세의 정신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아무래도 후자의 방향을 향한 해석이 더 가능성이 높은 것처럼 보인다. 

신적인 불투명성으로 귀착함으로써 인간의 얼굴이 지닌 불투명성을 심오한 신의 경지로 끌어올린 레비나스의 철학에 비하면 데리다의 해체론은 대단히 아나키즘적이다. 결국 언어적인 것이든 사물적인 것이든 의미의 동일성에 대한 임의적인 결정조차 거부하면서 끝없이 흔적의 흔적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기 때문이다. 흔적은 어의상 흔적을 남긴 원본이 있어야 하는데도 오히려 흔적을 남긴 흔적을 무한 연쇄의 형태로 찾아들어갈 수밖에 없고, 충전적인 사물의 지각이든 말이든 글이든 개념상 이미 동일성을 전제로 하는 현전하는 것들을 사실 흔적의 흔적에 불과하다고 보는 데리다로서는 그림자를 실체의 실체로 보는 셈이다.  플라톤의 완전한 뒤집기다. 하지만 데리다에게서 그림자는 투툼한 점액질의 감각적인 두께를 지닌 것이 아니라 차연이라는 개념에서 나타나듯이 현란한 그라마의 논리를 주파해 가는 말 그대로 흔적의 무한 연쇄라는 점이 메를로-뽕띠의 살의 불투명성과 다르다. 훗설의 ‘살아 있는(생생한) 현재’가 생생하게 살아 있기 위해서는 과거 지향인 파지(Retention)라고 하는 인간의 기억에 근거하지 않은 근원적인 흔적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는 데리다의 출발은 이미 시간의 불투명성에 철저히 의존하고 있다. 시간에서 감각적인 점액질의 성격을 빼고 나면 시간의 불투명성은 형식적인 궤도를 탈 수밖에 없다.


4. 불투명성의 현상학은 가능한가?


훗설의 현상학은 의식에 밝게 드러나는 지대를 바탕으로 어둡게 숨겨져 있는 지대의 음험하고 엄습한 지배력을 무력화하려는 데서 출발했다. 의식이 지향성은 존재의 근원적인 의식 의존성을 함축함으로써 종래에 영혼 운운하던 의식의 어두운 실체성을 파기함과 더불어 존재의 어두운 여분을 영도(零度)로 만들었다. 훗설의 현상학은 의식과 존재의 완전한 맞물림을 전제로 해서 그러한 맞물림이 이성적으로 완전히 성취되는 목적론을 확립했던 것이다.

전포괄적인 투명성을 바탕으로 하는 이러한 훗설의 현상학에 비추어 보면, 불투명함을 도입하는 것은 그 자체 현상학적이지 않다. 훗설이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읽고서 자기에서 헌정한다는 ‘겸손한’ 태도를 보였는데도 제자와의 의절을 불사할 정도로 분노한 것은 바로 자신이 생각하는 현상학의 근본 정신을 정면으로 공격하고 있었기 때문이라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도 현상학의 운동은 오히려 불투명성을 끌어들임으로써 탄력을 받아 걸출한 철학자들을 배출해 낸다. 과연 불투명성의 현상학은 가능한가?

불투명성은 본성상 의식이 책임지고 발언할 수 없는 지대 즉 의식이 좌초하는 지대를 노현한다. 그 곳은 제아무리 깊게 반성해 들어간다 할지라도, 제아무리 탁월한 직관을 발휘한다 할지라도 의식으로써는 결코 다가갈 수 없는 장소다. 그 곳에서 좌초하는 의식은 스스로의 구원을 위해 각성된 모습의 스스로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 더불어 자신의 어두운 출처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 ‘체화된 의식’은 각성된 의식의 관점에서 본 용어이지만, 그래서 데리다가 이성의 지배력을 깨기 위해 이성의 탈을 쓸 수밖에 없다는 식의 용어이지만, 그 자체의 관점에서 보면 체화된 의식은 곧 몸이다. 몸은 각성된 의식 쪽에서 보아 자신의 어두운 출처인 것이다.

그래서 불투명성의 현상학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의식 현상학이 아니라 몸 현상학이어야 한다. 불투명한 지대는 늘 그리고 이미 체화된 의식 즉 몸을 에워싸고서 관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늘 그리고 이미’라는 시간적 양상이 바로 불투명성의 시간 차원이다. 현재와 미래를 늘 그리고 이미 규정하는 영원한 과거가 바로 붙투명성의 시간 차원이다. 생생하게 살아 있다 하더라도 바로 그러한 현재를 바탕으로 한 각성된 의식으로써는 도대체 붙투명한 지대에 접근할 수 없는 까닭은 이렇듯 시간 차원이 아예 다르기 때문이다.

불투명성의 현상학이 가능하다면 그곳에서는 사유하지 않기 위해 사유하며 의식하지 않기 의식하고 반성하지 않기 위해 반성한다. ‘늘 그리고 이미’의 영원한 과거라는 시간의 차원을 견디지 못하는 투명성의 현상학에서는 반성하기 위하여 반성하고 의식하기 위하여 의식하고 사유하기 위해 사유하는 습성을 버리지 못한다.

불투명성의 현상학은 그러한 의식의 습성을 겨냥하지 않고 그 대신에 점액성이 높은 감각 덩어리에 온 몸을 드리우고자 한다. 몸은 감각적 파동의 응집체이자 감각적 파동을 ‘늘 그리고 이미’ 미세하게 그리고 다양하게 표출한다. 여기에서 몸의 근본적인 불투명성이 성립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몸의 갖가지 파동이 곧 존재의 갖가지 파동과 ‘늘 그리고 이미’ 조응한다는 몸의 지향성을 도입하게 되면 불투명성의 현상학이 가능하게 된다. 하지만 그러한 가능성은 ‘늘 그리고 이미’ 불가능성 속에 있다. 몸의 파동은 존재의 파동에 포섭되지만 존재의 파동은 몸의 파동에 대해 늘 잉여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늘 그리고 이미’ 확산되는 것이 파동의 본성이기에 몸에 대한 존재의 잉여가 잉여 자체인 것은 결코 아니기에 또 다시 불투명성의 현상학은 불가능한 가운데 가능한 것이다.











  



【발표3】 현대프랑스철학의 인문학적 배경: 기호학과 언어학을 중심으로


현대 프랑스 철학과 인문과학의 호혜성

―언어학과 기호학의 시각에서―


                                          김성도(고려대학교 언어학과)



1. 서론


프랑스 철학과 인문과학의 범위는 너무나 방대하여 어떤 제한적 제스처를 사용해도 필자의 지적 역량에서 벗어난다. 이들 두 영역의 방대함은 엄청난 외연적 범위뿐만 아니라, 내포적 복잡성에 기인한다. 거두절미해서, 이같은 주제는 결코 단일 분야의 정공자가 취급할 수 있는 연구 주제로 성립되기 힘든 것이며, 최고의 학술적 능력을 구비한 다수 연구자들의 지단적 노력으로서만 성취될 수 있는 장기적 기획의 대상 목록에 속한다.2) 프랑스 철학 담론과 인문과학의 담론의 축을 구성하는 시간과 공간의 좌표 설정을 비롯하여 양자의 지식 고고학적 계보도를 그리는 작업은 아마도 프랑스 학계에서도 조차도 완결된 작업이 이루어진 바 없을 것 같다.3) 주 3)에서 언급된 [철학 백과 사전]의 제 4권의 서문에서 시사한 나무의 이미지를 빌려와 설정한 철학의 網을 참조한다면, 프랑스 철학과 인문과학의 네 가지 갈래에는 프랑스 철학과 인문과학의 기록 매체인 각인의 문제, 이들 분야의 역사적 공간적 분산의 문제, 프랑스 철학 담론과 인문과학 담론의 고유한 형식의 문제를 비롯하여, 이들 양자가 구축한 場의 지형도가 모두 포함된다. 이를테면 프랑스 철학과 인문학은 프랑스어라는 매체의 도움을 빌려서 생산된 담론으로서 표현 매개물인 프랑스어로부터 완전하게 독립될 수 없다. 예컨대 프랑스 철학과 프랑스어 사이의 친화성 내지는 상동성의 관계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이 문제는 프랑스 철학의 언어적 토양을 상기하는 차원을 넘어서 프랑스어의 철학적 개념적 기층을 제공한 그리스어, 라틴어, 독일어, 영어 등을 비롯한 인도 유럽어족 전반의 개념적 구조의 검토로 이어져야 한다. 예컨대, 벵베니스트가 1958년 발표한 문제의 논문 [사고의 범주와 언어의 범주]에서 20 세기 최고의 인구어학자이며 일반 언어학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한 10 개의 범주들은 실상은 존재의 범주가 아니라, 그가 사용한 그리스어의 형태론적 특수성에 기인한 언어적 범주에 불과하다는 파격적 주장을 내놓았다.4) 이같은 테제는 일부 철학자들을 불편하게 만들었고 그들로 하여금 격렬하게 반응케 했다. 그것은 이 테제가 파생시킬 수 있는 두 가지 상황 때문이었다. 언어 상대주의 또는 언어 결정주의가 하나요, 다른 하나는 서구 형이상학 토대의 상대성이다. 이 문제는 프랑스 철학 담론과 프랑스어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도 그대로 적용되어서 심도 있게 논의될 가치가 충분히 있다. 그것은 프랑스 철학의 사유와 프랑스 철학의 글쓰기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의 양태성을 규명하는 일로서 프랑스 철학 담론의 의미론적 장, 논증의 전략 속에 배태된 언어적 존재론과 통사적 생산 등의 문제가 연루된다. 두 번째 갈래인 프랑스 철학과 인문과학의 분산은 프랑스어라는 특정 언어의 각인을 뛰어 넘어, 프랑스어와 글쓰기에서 구축된 지식을 공간과 시간을 통하여 분산시키고 확산시키는 문제로 이해될 수 있다. 요컨대, 프랑스 인문과학 담론의 자생력과 힘은 상당 부분 번역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프랑스 철학 담론과 인문과학 담론을 프랑스어에서 다른 언어들에로 이동, 이행시키는 것을 가능케 할 수 있는 다양한 전략들의 차원에서 번역의 노선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당장 머리 속에 떠오르는 과제 중의 하나는, 프랑스 철학과 인문과학의 한국어에로의 번역을 체계적으로 평가 및 비평을 하는 비판적 번역사를 쓰는 일이다. 이밖에도, 프랑스 철학과 인문과학의 독특한 형식들과 독창성을 비롯하여, 이 둘 분야의 실천적 장의 문제가 나머지 두 개의 가지에 해당된다. 특히 새로운 매체 기술의 환경 변화로 야기된 가상성과 이로 인해 제기된 존재의 새로운 양태성들이 철학의 긴급한 의제로 부상되었다.


2. 프랑스 철학과 인문과학의 관계: 호혜성


프랑스 철학과 인문과학이라는 주제를 구성하는 요소는 모두 세 가지이다. 이 가운데, 논자는 먼저 프랑스 철학과 프랑스 인문과학 두 분야의 내포와 외연의 방대성을 강조하고, 4 개의 연구 프로그램을 암시하였다. 또 하나 문제점은 접속조사 ‘과’가 내포하는 의미이다. 이 단음절 ‘과’의 함의는 매우 넓다. 병열, 중첩, 포함, 배제, 위계, 상보, 시간적 추이, 역접, 모순등, 사실상 접속 조사 ‘과’에는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관계 유형이 포함되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프랑스 철학과 인문학에서 접속 조사 ‘과’로 맺어진 관계의 성격과 본질을 기술하고 설명하기 위해서는 특정 시각과 관점을 필요로 할 것이다. 시간의 추이에 따른 통시적 시각, 일정 수의 주제를 선정하여, 두 영역의 공통 지대를 구성하는 주제적이며 문제 구성적 시각, 아니면, 지식 생산 체계의 제도적 시각, 또는 인문과학의 철학이라는 표현에서 나타나듯 철학이 인문 과학을 포괄, 포용하고, 상위 학문으로서 인문 과학 위에서 철학적 시각을 투시하는 방법, 또는 인문과학이 철학의 풍요화에 기여한 개념과 성취 등등 다양한 시각이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양자의 관계를 어떻게 파악하던, 철학자와 인문과학자 진영 모두에 의해서 받아들여지기를 희망하기는 힘들 것이다. 요컨대, 철학과 인문과학 사이의 관계에 함의된 사실성은 이 관계를 분석하기 위해서 채택된 관점에 종속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논자는 이 가운데 접속 조사 ‘과’를 양자의 상보성과 호혜성을 나타내는 기호로 상정하였다. 여기서 ‘과’는 양자가 서로 윈-윈 게임을 할 수 있게 만들어줄 수 있는 연결고리에 해당된다. 논자는 모든 인문과학의 활동에는 궁극적으로 철학적 문제가 배태되어 있다는 점을, 인류학, 언어학, 기호학의 예를 들어서 진술하고, 같은 논리로, 철학은 인문과학의 재원과 경험으로부터 자신의 모습을 새롭게 조망하는 것을 가능케 할 수 있는 참신한 시각을 제공 받을 수 있다는 점을, 서술성, 텍스트와 같은 기호학적 개념을 중심으로 간략하게 살펴볼 생각이다.  

논자는 다음 사실을 강조하였다. 즉, 철학과 인문과학 사이의 관계를 새롭게 발견하고 해명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철학자의 관점에서 이루어지거나 아니면 개별 인문과학자의 관점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철학적 실천과 개별 인문 과학의 활동을 초월하여 상위에서 이 두 분야를 조망할 수 있는 제 3 의 메타적 관점을 설정하는 것이 가능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철학적 사법권의 범위를 확대하여 철학자는 위에 치솟은 이 자리를 점유하려 할 것이다. 예컨대, 철학 전공자는 이미 제도화된 과학 철학을 하면서 인문 과학의 철학을 제시할 것이다. 실제로 인문과학의 본질과 방법에 대한 논쟁은 그 중요성을 갈수록 더해 가는 현대 철학의 중요한 장을 성립하고 있다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할 마음은 없다. 세속적으로 말해서 물론 인문 과학은 철학자의 밥그릇을 빼앗지는 않을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철학사는 역사가의 작업 마당이 아닌 철학자의 영역에 속한다. 언어학과 기호학 전공자인 논자가 철학과 인문 과학의 관계를 겨냥하는 것은 인문 과학의 관점에서 이루어질 것임을 분명히 하며 따라서 철학 전공자의 관용과 불간섭 원칙을 주문하는 바이다.

이어서 우리는 철학자의 관점과 인문과학 전공자의 관점 사이에 있는 분리적 성격을 완화시키기 위해서 철학과 인문학의 관계를 마치, 국제 관계 전문가가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검토하는 방식처럼, 다룰 수 없음을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즉, 이들 양자는 한국과 일본처럼 외연이 선명하게 구별되는 실재가 아닌 것이다. 물론, 철학과 개별 인문 과학은 학술 분야들로서 학문적 계통과 제도적 설정 차원에서 포함과 배제 원칙에 의해서 지배되는 내부와 외부에 의해서 상대적으로 선명하게 경표가 설치된 영토들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들 분야들은 학제성과 복합주제성으로 인해서 개별 분과 학문 이상의 것이며, 더 나가 철학은 개별 학술성을 뛰어넘는 정도가 인문과학에 비해서 더 강하다.

철학부터 시작해보자. 논자와 같은 기호학자가 철학의 정의를 기호학적 시각에서 분석해 본다고 가정해 보자. 십중팔구, 논자는 모든 철학자들의 만장일치로 가결된 하나의 정의를 찾기가 매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아마도, 이같은 철학의 규정과 관련된 복수성을 증언하는 단적인 사례는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을 달고 나오는 수 많은 철학서들일 것이다. 이들 저자들과 그들이 귀속된 전통 사이에서 제각기 그들은 새로운 개념을 제발명하거나, 기존의 한계를 넘어섰다고 주장하나,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완전한 의사 수렴을 발견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들이 제시하는 답변들이 일치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철학적 물음의 의미와 기능, 탐구 방법이 모두 제각기 다르다. 철학자는 그같은 상황은 결코 놀랄만한 일이 못된다고 대응할 것이다. 철학 전공자들의 대답을 정리하면, 철학은 반성과 성찰의 지대로서, 이 성찰의 내부에서, 바로 철학적 술어들과 개념들을 통해서 철학이란 것을 알려는 물음이 제기되는 것이다. 하나의 문제, 하나의 합리적 사유, 하나의 발화체, 하나의 개념에 철학적 성질을 부여하는 것은 바로 그같은 철학이 무엇이냐는 물음 자체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첨언할 것은, 이같은 반성과 성찰의 지대, 즉 철학의 정체성을 공식화하는 방식은 철학 자체를 끊임없이 재구성하는 역사적 생성에 달려 있다는 점이다. 철학적 담론은 결코 자연스런 대상물도 아니며 불변하는 사항도 아니다. 이점에서는 인문과학도 마찬가지다.

이제 인문 과학으로 넘어와 보자. 철학과 달리, 개별 인문 과학들은 고유한 대상을 소유하고 있다. 예를 들어서, 인류학은 모스와 레비-스트로스의 표현을 사용하자면, 독창적이면서도 특화된 지식 방식으로서, 다양한 사회와 문화를 현재의 시각에서 다룬다. 이를테면, 인식적 차원에서 인류학은 영토화된 학술 분야인 것이다. 다양한 사유들의 경험과 상상적 변이형들을 자유롭게 수용하는 철학과 달리, 인류학은 자신의 연구 분야로서 다분히 실재적이며 현실적인 경험에 직면한다. 인류학은 19 세기 말에 경험 과학의 위상을 획득하고, 20 세기 초에는 민족지 방법과 같은 조사 방법을 구비한다. 철학은 하나의 사변적 활동인 반면, 인류학자들은 데이터를 수집, 분류, 기술한다. 그렇다면 이같은 데이터를 갖고 어쩌자는 것인가 ? 오직 기술적 계통 분류적 기획 만을 노리는가 ? 여기서 곧바로, 인종학과 인류학 사이의 관계와 관련된 첨예한 문제가 제기된다. 물론, 영미권에서는 프랑스에서 오래 동안 인종학으로 규정한 것을 사회 인류학 또는 문화 인류학이라고 규정한다. 최소한 레비-스트로스와 모스가 도입한 인류학이라는 술어를 다시 취하고 제도화시키기 까지 말이다. 인류학은 인종학자들이 단지 자료를 기술하고 분류하는 데 만족하지 않았다는 점을 높이 평가한다. 인종학자들은 원하건 원치 않건, 일반화시킨다는 것이다. 일반화시키는 것은 개별화시키기를 시작할 때부터, 누락될 수 없는 절차인 것이다. 한편으로, 인종학자들은 특수한 사실들을 파악하기 위하여 일반적 개념들을 집결시킨다. 다른 한편으로는 인종학자들은 보편적 범위의 명제들을 발화하거나 요청한다. 이같은 보편적 명제들은 사회에서의 인간, 즉, 호모 쿨투랄리스 (Homo culturalis)에 대한 것이며 따라서 인간 그 자체와 그의 능력에 대한 것들이다. 달리 말해서, 사회 및 문화의 다양성을 설명하려는 인종학적 소명은 필연적으로 인류학에 기댈 수 밖에 없다. 즉, 인종학을 구성하는 인간의 고유함에 대한 물음을 말한다.

20 세기 초부터, 모스와 더불어서, 인류학을 말한다는 것은 인간 정신의 바탕의 통일성을 말함을 제기한다. 모든 것이 문화적이라는 강령을 내놓는 상대주의적 인류학자조차도 모든 인간들이 무엇인가 공통된 것을 공유하며, 바로 공약수에서 벗어나는 문화의 특질들, 사회적 공존의 공식을 발명하면서 다른 문화와 차별화시키려는 태도를 공유하고 있음을 암암리에 전제한다. 인간들은 도대체 공통적으로 그리고 고유하게 어떤 속성들을 갖고 있는가? 이 물음은 바로 인종학적 탐구에 가능성의 조건과 그 의미의 조건과 궁극적 목적을 부여하는 물음이다. 바로 이같은 물음에 대해서 철학적 인류학은 지난 수 세기 동안 끊임없는 논쟁을 벌여온 것이다. 철학적 사변과 인종학적 실천 사이의 활동과 관련된 표면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분야는 모두 인식적으로 철저하게 불연속적인 공간 속에 배치된 것이 아니라, 매우 근접한 장소들을 통한 사유의 장소들 속에 배치된다. 달리 말해서, 철학과 인문과학 사이의 관계를 다룬다는 것은, 철학이 어떤 식으로든, 인문 과학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물음을 던지는 것이다. 물론, 정반대의 경우가 성립될 수 있을 것이다.

    

3. 프랑스 철학과 인문과학의 관계 : 역사 인식론적 고찰


프랑스 철학과 인문과학 사이의 관계는 다면성과 중의성의 성격을 띠었다. 계몽주의 철학의 요람 속에서 탄생한 프랑스 인문학은 인간과 사회의 본질을 설명하고, 진보주의적 시각에서 더 나은 세상을 건설하겠다는 두 가지 야심을 목표로 설정한 원대한 기획을 구비하고 있었다.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은 인간 과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에 자리를 내주기 위하여 도덕학과 정치학이라는 전통적 명명을 포기하면서 이같은 혁신적 야심을 실현하는 데 헌신하였다. 19 세기 기간 동안 이들 인문과학은 자신들의 비약을 합법화시킬 수 있는 구체적이며 선명한 대상과 방법에 기초하여 인문학의 발전을 공고하게 만들기 위해서 자신들을 철학과 맺어놓고 있던 탯줄을 끊어 놓는데 성공하였다. 이어서 새로운 모험을 감행할 인문과학의 위대한 설립자들의 시선은 자연 과학으로 향하고 있었다. 만약 이성이 세계를 지배한다면, 이성이 자신의 날개를 펼칠 수 있는 것은 철학이 아닌 바로 과학적 방법에 힘입어서라는 확신이 도사리고 있었다. 이것은 소쉬르의 언어학, 뒤르카임의 사회학,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서 확인된다.

20 세기에 진입하면서 제 자리를 잡고 제도화된 프랑스의 인문과학은 오랜 준비 기간을 거쳐 창발한 구조주의와 더불어 질풍노도와 같은 시기를 맞는다. 인류학, 언어학, 정신 분석학의 제도적 부상과 인식론적 단절을 통한 제학문에서의 관통은 철학의 종언을 외치면서 그 대가로 실현된 측면이 강하다. 인문학과 철학의 그같은 단절은 상당 시간 많은 사람들로부터 향유된 것으로 판단된다. 인문과학과 철학 사이의 깨진 틈, 아울러 그같은 균열과 합법적 지식이라는 쟁점 차원을 비롯하여, 지식의 고고학과 인식론적 토대와 관련된 첨예한 문제들이 20 세기 프랑스에서 특히 부각되었다. 그것은 철학의 아성 앞에서 프랑스 인문과학이 자신의 자리를 굳건하게 자리 잡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는 방증이다.5) 

오늘날 위대한 통일적 패러다임의 퇴락과, 개별 인문과학 분야에서 성립된 다양한 지식들에 의해서 획득된 합법화는 인문과학과 철학 사이의 관계를 평화로운 관계로 진화시켜 놓았다. 더 이상 인문과학은 철학과 더불어 과거와 같은 긴장 관계를 맺을 필요가 없다. 심지어, 양자 사이의 관계가 전복되는 것을 목격한다. 구조주의 사상 이후로 철학자들은 자신들의 성찰의 근원을 경험적 탐구와 실험실의 연구 결과에서 찾았으며, 다른 한편으로 오늘날 인문과학자들은 자신들의 경험적 일차 자료와 문제를 최적의 상태에서 분석하기 위해서 그들이 필요로 하는 개념들을 철학 속에서 찾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철학은 자신의 이중적 역할, 즉, 한편으로는 인문과학에 제공하는 개념의 공급자로서, 다른 한편으로는 해당 학문들의 내용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통한 철학적 이윤 회수를 수행한다.6) 인문과학에 철학적 자본을 투자하고 개별 학문에서 여과된 과학적 내용을 철학적 반성을 통해서 다시 회수해가는 철학의 전통적 역할은 지식의 원자화와 파편화로 인해서 인문과학 전공자들끼리는 물론, 단일 학술 분야의 전공자들 사이에서도 소통이 불가능해진 상황 속에서 더욱더 그 필요성이 절감되었다. 풀어 말해서, 인문과학의 개별 학술 분야들의 지나친 전문화와 세분화로 치닫는 이같은 진화 방향은 일종의 지식의 봉토화, 파편화, 부족화로 유도되었으며, 다시 자신들의 과학적 내용을 재전유하기 위해서는 반성적 유형의 지식에 의해서 극복되어야 했는데, 다행스럽게도 그같은 임무가 철학에 부여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 철학은 지식의 파편화를 지양할 수 있는 포괄적 소명을 띠는 두 번째 층위의 문제 설정 프로그램을 개발해야하는 자신의 소명을 다시 찾을 수 있었다. 철학의 ‘오르가논’이 반성이라는 점에서, 철학이 지식의 생산으로부터 가능케 하는 전유는 여러 인문과학에 의해서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체감되었다. 특히, 이같은 기능이 인문과학의 빈번하게 불협화음을 일으키는 연주 속에서 철학의 절대적 제어라는 특징을 과시하려는 제국주의적 야심을 자제한다는 점에서 그같은 철학의 소임은 명분을 얻었다. 철학은 시간이 갈수록 인문과학의 생성 그 자체로서 체험되었던 반면, 인문과학은 철학을 자신들의 과거, 자신들의 고고학적 시원으로 바라보았다. 이같은 새로운 풍경의 내부에서, 철학은 본질적인 소통적 역할을 맡을 수 있다.

인문학과 철학 사이의 관계의 평화로운 관계는 두 가지 진화의 산물이다. 먼저, 의미 일반에 대한 총체적 통어의 자리를 주장하지 않는 철학의 자기 한계 설정과, 철학적 물음들에 기대어서 자신들의 고유한 문제를 허위로 극복하려는 흐름 속에 매몰되지 않는 인문과학의 진화가 그것이다.  풀어말해서 철학은 추상적, 총체적, 유일무이한 이성에 대한 정박과 결속을 과감히 포기하였다. 그리고 절대적 이성으로부터 다원적, 실천적, 복잡한 합리성의 복수성으로 이동되었다. 이것은 철학과 인문과학을 두 개의 공약 불가능한 노선으로 파악하는 것을 가능케 했다. 따라서 제왕으로서의 철학자의 모습은 사라진다. 하지만 이같은 상황은 더욱 더 복잡해지고, 분산되고 파편화된 현실을 판독 가능케 만들 수 있는 소명을 가진 복잡한 담론으로서의 철학 담론의 역사적 사명을 축소시키지 않는다. 이같은 사태 이후에 발생한 반성성은 반성적 철학이라는 전통의 반성성에 비해서 더 폭 넓은 임무에 해당된다. 이 수준에서, 우리는 더 이상 위대한 체계의 건설에도, 형이상학적 기획으로서의 철학의 해체의 건설에도 해당되지 않는 현대성의 새로운 철학적 시대 속에 진입했던 것이다.

현대 철학의 새로운 임무가 함의하는 의미의 문제의 재배열은 인문과학과 더불어, 지금까지 적대성 차원에서 생각되던 관계들을 새롭게 갱신하게 이른다. 물론, 인문과학은 계몽주의의 기획의 연장 속에서 탄생하였으며 이성에 의해서 실현된 진보에 대한 신념 속에서 실현되었다. 하지만 인문과학은 자신들의 시도를 인간 역사의 가능한 제어 또는 투명성의 믿음에 내재한 순진함에 대한 비판으로서 정의된다. 인문과학의 역사적 역할은 따라서 개인과 사회에 그들도 모르게 미치는 다양한 규정들을 보여주는 데 있었다.

이같은 시각은 자신의 외부에서 객관화된 것을 재전유할 수 있는 철학이 파편화된 인문과학의 지식들을 다시 아우르는 개방된 노선을 채택하도록 만들었다. 철학은 점차로 윤리, 법, 정치, 사회 문제 등에 민감해졌다. 특히, 이같은 대화의 조건은 두 전통 사이에서 더 우호적이다. 그 결과, 인문학에 고유한 동학이 나타나 그 이전 시대와는 반대로 스스로를 개선시킨다. 자신들의 철학적 기원에서 벗어나서, 과학적 능력의 이름으로 철학적 지평의 초월로서 스스로를 제시하는 대신, 인문과학은 자신들의 철학적 생성에서 작업할 수 있다.

그같은 개방성은 철학자들에게 능동적 대화에 기초한 철학의 역사라는 오랜 전통과 더불어 과학적 발견의 문제화를 재갱신하게 만들 수 있다. 이같은 시각은 철학자들이 자신의 선험 속에 빠진 제한된 철학의 단절적 빈곤적 개념에 의존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4. 철학적 문제의 소거불가능성: 인류학, 언어학


1) 언어학의 존재론 : 언어학의 실재와 랑그의 문제

언어학은 기본적으로 인류문의 유산으로서 지구상에 존재하는 자연 언어들에 대한 기술과 설명을 목표로 하며, 50 년대 이후에는 수리화의 테크닉을 마련하여 자연 언어의 자동 처리를 목표로 삼게 된다. 철학을 어떤 식으로 정의하던, 언어학처럼, 실증적 지식으로 이루어진 인지적 수순의 유형은 아니다. 따라서 양자 사이에 연속성의 해결책을 마련하는 것은 힘들어 보인다. 하지만 철학은 주로 존재론 또는 방법론과 관련된 매우 일반적인 수준에서 실증 과학의 결과들을 다룰 수 있다는 점에서 철학과 언어학의 접점은 생각할 여지가 많다.

언어학자가 구성하는 실재들의 위상은 무엇인가? 이 물음은 특히, 표면적 발화체 속에서 나타나지 않는 따라서 언어 사용자들이 현실적으로 지각할 수 없는 실재들에 대해서 던져볼만한 질문이다. 이것은 오늘날 언어 이론의 표상에서 심층 구조와 대립되는 표층 구조라고 부르는 것으로서, 이른바 제로 요소라고 불려지기도 한다. 예컨대, '노래불러‘라는 한국어 표현이 공주어를 포함한다고 말한다면, 도대체 이 공주어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어디에 존재하며 무엇에 쓸모가 있는 것인가? 예문에서 분명 문법적 주어는 동사의 활용에서 표현되지 않았다. 이 물음은 이론적 구성 자체와 관련된다.

이같은 유형의 존재론적 문제는 모든 언어학의 영역들과 관련된다. 한 가지 예로 비교 역사 문법에서 재구의 경우를 들어보자. 1879년 소쉬르는 그의 나이 약관 21 세에, 인도 유럽어의 상이한 모음들의 가치를 설명하기 위하여, 인도유럽의 윈시적 상태에서 일정한 음운론적 요소들의 존재를 상정하였다. 이것을 자음 계수라고 부른다. 이들 요소들은 원시 모음들과 결합될 경우, 특정 모음의 궁극적인 출현을 설명해 줄 수 있게 될 것이라는 가설을 세웠다. 소쉬르는 그의 이론을 정당화시켰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 알려진 일정 수의 사실들을 다시 무리화하는 것을 가능케 했으며, 따라서 자음 계수가 표현하는 규칙성 속에서 변화 속에서의 일정한 규칙성의 가설을 수단으로 해서, 그같은 사실들을 설명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1927년, Kurlylowicz는 이미 사어가 된 히타이트어의 h속에서 두 개의 계수를 인지할 수 있었다. 이같은 유형의 예측은 언어학의 다른 영역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론의 여지가 없는 방법론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존재론적 문제는 결정적이다. 재구성된 실재는 무엇인가? 가장 직접적인 입장은 마치 선사 고고학이 화석화된 요소들로부터 동물 또는 식물의 일정 부분을 재구성하는 것처럼, 과거에 존재했던 것이라고 생각하는 데 있다. 만약, 하나의 어족(예컨대 윈시 인도 유럽어)의 원시 상태를 구성하는 요소들의 집합을 재구성한다면 윈시 인도 유럽인들이 말하던 언어를 재구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상적으로 보인다. 독일 언어학자 쉴라이셔는 이것을 기초로 해서, 윈시 인도 유럽어로 쓰여진 우화를 쓰기도 했다. 하지만 이 원시 인도 유럽어가 존재했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결정적 증거는 없다. 독일의 소장문법학파는 쉴라이셔에 비해서 유명론적 노선을 채택한다. 즉, 재구된 요소들은 단지 하나의 어족에 대해서 갖고 있는 우리들의 지식의 상태를 표상할 뿐이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즉, 이같은 어족의 통일성 정도에 대한 우리들의 가설들을 성립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같은 해결책은 매우 불만족스러운 것이다. 만약 재구가 참이라면, 어떻게 재구된 요소들의 전체에 대해서 일정한 현실을 부여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소쉬르의 계승자인 옐름슬레우는 재구된 요소들은 단지 목격된 상이한 언어 형태들 사이의 종속 관계를 요약하는 한 가지 방식이라고 생각했으며 거기서 기원 언어의 구조의 표상을 보고 있다.


* 랑그의 문제

우리 모두는 직관적으로 나의 언어가 무엇이냐고 물을 때 특별한 문제에 봉착하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한국어를 모국어로 사용하기 때문에 우리의 언어는 한국어라고 답할 것이다.

방언학의 예를 들어 보자. 우리는 어떻게 방언의 진정한 경계선을 찾을 수 있는가? 이것을 위해서는 일련의 특징적인 특질을 파악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같은 특질들은 상이한 경계선에 따라서 분배된다. 그 결과 상이한 화자들 사이에는 진정한 연속성이 존재한다. 하나의 방언에서 다른 방언으로 자신도 지각하지 못한채 넘어간다. 하나의 방언 또는 언어는 마치 개, 장미, 돌처럼 자연적 종이 아니라, 그것의 정체 파악은 계약적이라는 것이다. Victor Henvy는 그의 저서 [언어의 이율배반성 antinomies linguistiques] (1896)에서, 언어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이라는 문제를 제기하면서 연속론을 채택함으로써 이율배반을 극복한다. 소쉬르는 [일반 언어학 강의]에서, 랑그는 언어학의 유일한 대상이며, 대상을 창조하는 것은 관점이라고 주장한다. 이같은 유형의 해결책은 랑그라는 실재의 존재론에 대해서 유명론적 개념을 도입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소쉬르의 개념은 극도로 미묘하다. 랑그를 실질이 아닌 형식으로 간주하면서 그의 개념은 실재론적 선택의 유형에 길을 터주고 있다. 실체론의 거부는 그의 일련의 이분법들에 의해서 표현되는 불연속성의 채택에 해당된다.

랑그는 순수한 가치들의 체계로서, 그 무엇도 그 구성항들의 순간적 상태를 벗어나서 결정짓지 못한다. 달리 말해서, 언어의 한 상태의 한 요소가 있을 때, 그것의 언어적 현실은 오직 동일한 상태의 다른 요소들, y, z와의 관계에 의해서 결정된다. x가 v로부터 왔다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의 현재적 현실에 대해서 그 어떤 심오한 영향도 행사하지 못한다. 아울러, 시스템으로서의 랑그는 소쉬르가 파롤이라고 부르는 개인들의 언어 활동과 혼동되지 않는다. “언어는 집단 속에서 각각의 두뇌 속에 배치된 흔적들의 형식 아래, 존재한다. 이것은 마치 개인들 사이에서 동일한 사본들이 배분된 사전의 이미지와 같다.”

따라서 그것은 그들 각자 속에 놓여 있는 그 무엇이며,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이면서, 동시에 보관인 또는 수탁자의 의지를 벗어나 자리 잡는다. 이같은 랑그의 존재 방식은 다음과 같은 공식으로 표명된다. 1 + 1 + 1+ 1+1 ...=1“. 이와 달리, 파롤 속에서는 전혀 집단적인 것이 없다. 제 발현은 개별적이며 순간적이다. 여기서는 이같은 특수한 사실들의 총합 이외의 것이 없다. 1 + 1‘ + 1’‘ + 1’‘’ ....“

프랑스의 구조주의는 이같은 존재론적 개방성을 발굴하게 되며 총체성이 부분들에 선행하여 존재한다는 사실에 의해서 규정되는 구조 또는 시스템 속에서 진정한 언어적 실재계를 보게 된다. 그같은 구조 또는 시스템은 개별 특이적 발현 속에서 경험적으로 주어질 수 없으며, 언어 주체의 활동을 초월하는 것이다. 문제의 관건이 바로 하나의 형식, 즉 가치들을 규정하는 대립들의 시스템이라는 점에서, 이같은 소쉬르의 해결책에서 플라톤주의의 한 변이형을 찾으려는 유혹에 빠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정작 소쉬르는 보다 사회학적 개념을 갖고 있었다. "만약, 새롭게 발생하는 모든 것이 담화의 기회를 통해서라면, 이것은 동시에 모든 것은 언어의 사회적 측면에서 진행됨을 말하는 것이다.“ 수수께끼는 여전히 남는다. 어떻게 개별적 행위들로부터 그것들의 사회적 효율성 즉, 시스템으로 이동할 수 있단 말인가?

랑그의 표상 속에서 소쉬르의 제이분법, 즉 불연속성을 수용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존재론적 문제로 유도된다. 랑그의 문제는 현대 언어학의 철학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 가운데 하나이다. 촘스키의 생성 문법은 진정한 문제 해결 없이 개념들을 이동시켜 놓았을 뿐이다. 그의 능력과 수행 개념은 소쉬르의 랑그와 파롤의 대립을 여러 면에서 상기시킨다. 물론 주된 혁신은 대립의 각항에 발화자를 도입했다는 데 있다.

촘스키는 언어 능력이 언어학자의 진정한 대상이라고 주장하면서 언주에 의한 발화체의 생산과 청자에 의한 그것의 해석 사이의 총체적 가역성(réversivilité)을 주장한다. 하지만 이같은 가설과는 정반대로, 생산 과정의 일정한 비가역성이 존재한다는 점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촘스키의 언어 개념은 이렇게 정리될 수 있다. 내포 차원에서 언어는 발화자에 의해서 내재화된 규칙들의 총합이며, 외연 차원에서는 규칙들에 의해서 생성된 문장들의 총합이다. 그는 전자를 내재적 언어, 후자를 외재적 언어라고 명명한다. 이같은 언어 표상의 실재론에 대해서 적지 않은 논쟁과 물음이 제기되었다. 그의 이론은 늘 기원적인 상징 시스템을 전제로 하며, 그것은 곧 생득주의에 대한 귀결로서 해결된다. 그렇다면 외재적 언어와 한국어라는 사회학적 현실 사이에는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 그는 말한다. 양자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언어의 기원 속에 있는 보편적인 생물학적 구조를 옹호하는 그의 테제는 약화될 수 밖에 없다.


2) 인문 과학의 복잡성 : 언어학적 실재의 표상 문제

인문 과학의 존재론은 자연 과학의 존재론에 비해서 훨씬 더 복잡하다. 자연 과학의 경우, 우리는 단지 이론 T 와 이론의 표상의 대상 Oi 의 속성들 사이의 관계를 밝히면 된다. 이 관계에 대해서 철학적 원칙과 교리가 대립된다. 실재론자들은 T 의 실재들이 O 의 실재들과 동일하다는 것을 받아들이며, 그것이 물질적 현실이건 아니면 또 다른 세계의 현실이 관련되건 마찬가지다. 반면, 유명론자들은 T 의 실재들이 표상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또는 조작론자들은 그같은 실재들은 우리가 현실에 대한 우리의 포착과 이해를 조직화시키는 방식에 상응할 뿐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대부분의 인문과학과 마찬가지로, 언어의 경우, 제 3 의 요소 유형을 도입해야 할 것이다.  즉 주체가 대상 Oi를 생산하는 메카니즘이다. 물론 그같은 메카니즘을 생략할 수 있으며, 언어학은 단지 T 와 O 사이의 관계에만 관련되었다는 주장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이같은 태도는 미국의 언어학자 블룸필드가 20 세기 초에 반정신주의를 채택하면서 피력한 객관주의적 입장이다. 따라서 존재론적 물음들은 자연 과학에 대해서 마주치는 문제들의 유형에 속한다. 하지만 만약, M을 도입한다면, 그것에 하나의 위상을 할당시켜야 할 것이다. 객관주의를 거부하는 두 개의 입장이 지배적이다. 해석학적 입장에서는 T 가 언주가 의식할 수 있는 M 의 한 부분에 대한 표상과 섞인다고 가정할 것이다. 즉, 자신이 행하는 것에 대한 의식의 표상은 곧 행동의 내용에 대한 지식이다. 반면 실체론적 입장에서는 O 에 대한 지식, 즉 표상 T 는 M 속에서 진행되는 것에 대한 표상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이때, 표상은 발화자가 반드시 인지하지는 않는다.

실체론적 입장이 언어학사에서 가장 널리 전파된 입장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촘스키 이론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제시하는 비전은 매우 흥미롭다. 촘스키가 제시하는 보편 문법의 원칙들은 정확히 화자의 머리 속에 이식된 것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즉, 인간에게 고유한 생물학적 차원의 언어 구사 능력은 알고리듬의 집합으로서 이것은 인간 두뇌이건 컴퓨터이건 무차별적으로 이식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것은 매우 강한 존재론적 테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3) 인류학의 철학적 차원

역사 철학을 언급하는 의미에서 인문과학의 철학이 인류학 조사의 실행에 선행한다. 하지만, 인류학적 조사 자체가 그것의 전개 과정에 있어서 철학적 양상들을 포함한다. 이같은 긍정을 두 가지 증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첫째, 인류학적 연구는 레비-스트로스가 말했듯이, 철학적 태도는 회의의 어머니이자 유모라는 점에서, 철학적 성격을 소유한다. 예컨대, 자신의 사회와 가장 동떨어진 사회와 문화에서 현지 조사를 하는 사람은 자신의 확실성을 타자의 확실성에 노출시킬 수 밖에 없다. 아울러, 자신의 문화가 수 많은 문화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는 사실을 충만하게 의식하도록 할 것이다. 인종학자는 타자로부터 그와 동화되지 않은 채로, 자신의 고유한 가치들의 관점에서, 그 타자가 자신의 사회적 공존을 어떻게 조직화하고, 자신의 고유한 범주들에 따라서 세계를 사유하는가를 배운다.

인종학적 조사가 철학적인 이유는 하나 더 있다. 여기서, 철학자 Vincent Descombes 의 작업을 참조하자.7) 그는 자신의 전공 분야인 철학과 인간 과학 사이의 진정한 대화를 세우려 노력하면서, 인간 과학의 피할 수 없는 철학적 몫을 분명히 밝혀 놓았다. 그가 채택한 수순의 독창성은 이같은 철학적 몫을 일반적으로 그것을 포함하는 영역 속에 가두어 놓지 않았다는 데 있다. 이를테면, 사회적 인과율의 이해, 설명 또는 본질에 대한 논쟁을 지양한다. 그는 이같은 물음들을 존재론이라는 또 다른 영토로 자리 이동시키면서 그같은 물음들을 재공식화한다. 이어서 그는 이같은 물음들이 인문과학의 이론가 또는 인식론 전공자에 의해서 사후에 제기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문학 탐사의 내부 자체에서 탄생함을 보여준다. 사회, 문화, 언어 등 집단적 성격을 띠는 모든 실재에 대한 발화체는 일정한 존재론을 전제로 하며, 그같은 개념들에 대한 지시를 부여하는 특정한 방식을 전제로 한다.

그 결과, 모든 인문과학자들은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자신의 존재론적 견해가 갖는 철학적 농도 덕분에 철학적 공간에 침투하게 되는 것이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자. 현대 인류학과 문화 연구에서 제기되는 동시대성의 문제이다. 그 문제의 파급 범위는 물론 철학적이다. 사회 또는 문화에 대한 실재론적 개념을 옹호하는 사람들과 인지 과학의 발달에 의해서 영향을 받은 인류학의 대변자들 사이의 대립이다. 문제의 관건은 이미 19 세기 중반기부터 제기되어온 방법론의 갈등이 다시 새롭게 갱신된 형태이다. 물론 그 논의는 그것의 유일한 목적으로서, 자연 과학과 문화 과학 사이의 방법의 대립을 밝히는 것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두 가지 종류의 과학이 존재론적으로 구별되는 대상들에 적용될 수 있는지, 아니면 이들 대상들은 동일하지만 단지 상이한 관점으로부터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인지의 여부를 알아내는 사실에 대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아울러, 어느 정도까지 심리학이 인문과학과 사회 과학에서 자연 과학 속에서 기계학에 할당된 역할을 맡을 것인지에 대해서 자문했다. 이점에 대해서, 언어학과 인류학은 프랑스의 경우 잘라 말했다. 즉, 웨버, 뒤르케임, 소쉬르의 노선을 따르며 분트가 시사한 심리학 노선을 거부하였다. 따라서 프랑스에서는 미국에 비해서, 언어학과 인류학이 심리학과 완전 분리 절연되는 상황을 낳게 된 것이다. 이것은 근본적인 대립으로서, 단지 방법론의 차이로 환원될 수 없다. 그 갈등의 핵심 의제는 분명히 철학적이다. 인류학자나 기호학자가 문화적 지식의 획득, 조직, 전달 형식의 기술 영역에서, 채택하는 선택은 특히, 언어 철학, 행동 철학 장 속에서 도출된 개념적 탐구와 동시에, 자연 과학과 인문 과학의 대립에 대한 재평가에 할애된 인식론적 성찰을 포괄하는 것이다. 


5. 기호학이 철학에 선사할 수 있는 새로운 시각: 텍스트성과 서술성


1) 철학적 텍스트성에 대한 기호학적 시각

텍스트성(textualité)이라는 술어는 텍스트의 의미론적 위상과 관련되며, 텍스트 조건의 양상들, 텍스트의 가능성과 관련된 문제들의 총화와 연관된다. 철학은 텍스트라는 문제의 발견으로부터 면역된 상태로 남을 수 없다. 사람들은 너무나 오랫동안 사상사를 마치 글쓰기가 의미를 만들어내는 작업으로서의 스타일과 무관한 것처럼 체험했다. 철학적 물음 제기는 결코 투명성 속에서 생성될 수 없는 것이다. 철학의 텍스트성을 의식하는 두 가지 태도가 존재한다. 하나는, 재구성주의적 태도로서 담론적 다양성을 넘어서 형식적 불변항을 구성하려는 태도이다. 이같은 시각에서 철학적 장르는 따로 없으며, 오직 재구성해야 할 구조가 존재하는 체계들이 존재할 뿐이다. 또 다른 하나는 해체주의적 태도로서, 철학 담론에 내재하는 수사학의 존재를 주장하는 진영으로서, 각각의 장르는 자신의 고유한 규칙들을 소유한다는 전재에서 출발한다. 철학자는 그같은 규칙들을 활용하며 때로는 그것들을 갖고 술책을 쓰기도 한다. 철학자의 작품은 내용이 형식과 구별되지 않는다는 넓은 의미에서 하나의 스타일을 갖는다.

모든 철학은 해석적 본질을 머금고 있다. 왜냐하면 철학의 타당성은 자신이 내놓은 언표들의 지시적 진리에 달려 있기 보다는 철학적 언표들의 골자와 짜임을 해명할 수 있는 힘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이같은 철학적 씨실과 날실은 흔히 논증적이라고 불려진다. 이때 논증적이라는 표현은 증명 테크닉 보다는 지성 작용의 경로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철학이라는 직물을 짜는 씨실과 날실은 테제의 타당화의 수단으로 사용되지만, 이같은 수단들이 반드시 증명적 본질에 속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철학적 텍스트성은 결국 하나의 짜임에 따라서 사고의 형상들의 방향을 결정짓는 시원적이며 건축적인 원칙이다. 텍스트성이란 개념은 단지 합리적 이유들의 정리 정돈이거나 사실들의 판독 가능성의 조건들일 뿐만 아니라, 이같은 텍스트의 질서가 철학적 사고 형상들을 운반하는 언어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이기도 한다. 철학은 자연 언어라는 구조물로 세워진다. 이런 관점에서, 철학적 텍스트는 다른 모든 담론들과 마찬가지로, 그 기초에 있어서, 일상 언어의 형상들 (또는 비유들)에 귀속되어있는 ‘모호성’의 필연적 함유량을 간직한 채 작동된다. 따라서 철학의 이해는 언어 해석의 모든 제약과 구속을 통과해야 한다. 그 결과, 전형적으로 철학적인 것은 이같은 형상들이 개념적 실타래로서 재범주화되고 구조화되는 일상언어의 형식에 의해서 규정된다.

기호학의 본령이 지식의 모든 형상들 (언어적, 서사적, 미학적, 논증적 등등)의 구조화를 담당한다면, 세계를 총체성으로 해석하는 모든 철학적 텍스트는 이미 본질적으로 기호학적 활동이다. 20 세기 중반기 이후로 기호학은 근본적인 딜레마에 빠졌다. 철학에 동화되지 않으려는 자주적 노선을 채택하면서도, 기호학은 스스로 하나의 제도화된 독립적 학문으로서 규정되는 데 이르지 못했다. 하지만 인문과학과 철학 사이의 경계선이 조밀하고 잠정적이라는 점에서 기호학은 이 두 비전이 소통하는 늘 변화하는 언저리를 점유한다. 과학으로부터, 기호학은 현상을 토대가 아닌, 현상으로서 설명하려는 야심을 드러낸다. 철학으로부터 기호학은 이론적 대상의 고유한 장을 규정할 수 없다는 불가능성을 받아들인다.

하나의 과학은 대상이라 불려지는 이론적 단위들로 현실을 재단하는 제스처에서 탄생한다. 이같은 대상들은 닫혀진 시스템 내부에서 관계를 통하여 규정되며 한정된 수의 변별적 자질들의 목록을 갖고 있다. 이같은 변별적 자질들은 대상들에 대해서 일의적인 정의를 부여하며, 이 정의는 곧 이 단위들이 시스템의 배분 속에서 점유하는 위치에 해당된다. 시스템에 속하지 않는 모든 것은 제외된다. 이같은 시각을 채택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논리적 장점은 확실성의 정도를 유일하게 담보할 수 있는 연역적 추론들을 특권시할 수 있는 데 있다.

기호학의 당혹감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 있다. 기호학은 의미를 생산하는 데 사용될 수 있는 모든 것을 기술하는 임무를 부여 받는다. 이야기, 대화, 예술 작품 등 인간 문화의 모든 지식의 형상들을 말한다. 동시에, 기호학은 과학으로서 스스로를 규정짓기를 갈망한다. 즉, 닫혀진 시스템, 공식들, 일정수의 변별적 자질들에 토대를 두려 한다. 이 때 위험성은, 하나의 이론적 시스템이 되면서, 기호학은 인간적 경험 역시 이론적인 대상으로 만들려는 데 있다. 아울러 행동과 정념으로 이루어진 의미 작용에 연역적 정의를 부여하려는 것이다.  예컨대 구조 기호학의 이상형은 하나의 시스템 내부에서, 차이들의 효과로부터 모든 의미 작용을 파악하는 데 있다. 일정한 방식으로, 의미 (sens)를 엄밀한 형식으로 연역하는 것이다. 이같은 엄밀성이 이론적 유형의 발화체에 적용될 때, 결과는 매우 만족스럽다. 반면, 생활적 화용적 유형의 발화체에서 그같은 엄밀성은 사물의 풍성함을 불모화시킬 수 있는 환원주의에 빠질 소지가 농후하다. 자신이 간직하고 포착하고 싶은 것만을 변별성의 여과기를 사용해서 선별적으로 통과시키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르네 톰은, “엄밀한 모든 것은 의미하는 바가 없다.” (tout ce qui est rigoureux est insignifiant) 이라고 했던 것이다. 따라서 과학의 개념을 확대해야, 비로서 정밀성의 상실을 대가로 , 의미 작용 사실들의 질적 성질을 다룰 수 있게 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가추법을 하나의 대안으로 상정할 수 있다. 가추법의 형식은, 하나의 놀라운 사실 앞에서 다음과 같은 형식을 띤다 : “만약 A (하나의 명제) 가 참이라면, C 는 하나의 규범화된 사실로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즉 A 가 참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가장 높은 원칙과 원인들의 추구를 사유 가능한 무엇인가로 전환시킬 수 있는 것을 착상하는 데 있다. 퍼스는 ‘철학의 개념적 구성이 결코 관찰된 사실들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근본적 명제들이 합리적 이성을 편안하게 해 줄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라는 진술을 한 바 있다. 과학과 달리, 철학은 따라서 고유한 대상을 갖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 현상들의 사고를 판독 가능하게 만드는 데 목적을 두는 개념적 구성이다. 철학은 사실들을 증명하지 않고, 의미 작용, 즉 해석의 노선들을 제안한다. 우리가 철학적 텍스트성이라고 언급한 이유는, 바로 철학이 대상들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실타래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직물과 실타래는 동의어이다. 직물은 결코 참이거나 거짓이 아니라, 잘 짜여진 것이냐 아니냐 가운데 하나 일 뿐이다. 달리 말해서 철학적 발화체는 , 개별적으로 취했을 경우, 진리가를 갖지 못하며, 일반화될 수 있는 의미조차 갖지 못한다. 이론적 발화체들과 달리, 이같은 동일한 실타래는 기원적인 비유적 전용들이다. 철학적 언표의 가치는 관찰 가능한 것과의 상응에 기초하여 판단할 수도 없으며, 순수한 이론적 언표들에서처럼, 시스템 속에서 통사적 통합에 기초하여 판단할 수도 없을 것이다. 철학적 실타래는 현실계의 위반으로부터 탄생된 형상들의 방향을 정하도록 되어 있으며, 현실계 자체의 사고를 해명하는 작업으로 향한다. 이점에서 바로 철학의 의미와 그것의 진리가가 놓여 있는 것이다. 기호학의 임무는 철학 담론의 형상들을 식별하고, 철학적 텍스트의 실타래의 가추라는 이중적 작동으로 이루어진다.


2) 철학담론의 서술성

철학에서 이야기(récit)의 문제는 매우 많은 접근법들을 수용할 수 있다. 몇 가지 이정표를 상기해보자. 이야기의 차원은 먼저 철학 담론을 관류하는 제 분할들의 총화에 따라서 식별될 수 있다. 그 결과, 이야기는 철학적 담론의 고유성에 속하지 않는 것으로 파악되며, 이야기는 철학에서 가장 외부에 있는 것인 동시에, 가장 은밀한 것으로 간주된다. 이야기는 따라서 동시에 현교적이며 비의적이다. 철학 콩트에서처럼, 또 도덕적 교육적 가치를 갖는 우화에서처럼 현교적이다. 따라서 이야기는 보다 접근 가능하고, 대중적 견해에 가까우며, 쉽게 기억될 수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하지만, 이야기는 알레고리, 교훈적 우화에서 하나의 교리의 비밀을 지칭한다는 점에서 비의적이다. 이야기라는 장르는 자신의 발화체로서 이해될 수 없이 하나의 사고의 내부와 외부를 소통시킬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철학에서 이야기가 갖는 양가성은 대략 그렇게 정리될 수 있다.

다른 한편, 이야기는 철학이 그 기원에서부터 부정했던 신화와 결속된다. 철학은 신화와 맞서 성립되었으며 동시에 신화는 철학의 내부 자체로부터 철학을 끊임없이 위협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 결과, 철학은 자신이 끊임없이 신비적 상태로 귀환하려는 위협을 받는 바로 그 순간 속에서 가장 액면적인 의미에서 신화들을 들려준다. 철학 담론에서 신화를 축출시키는 것은 과잉 폭력을 동반하지 않는 한 그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음을 역사는 입증한다. 

하지만 이야기하기(narrer)란 역사와의 관계를 지칭하며, 따라서 시간 속에서 사건들이 조직화되는 형식을 지칭한다. 이런 의미에서 이해될 경우, 철학적 이야기의 영역은 방대하다. 철학자의 삶, 줄거리, 철학적 관념의 이야기, 이야기가 특권시되는 표현 방식이라 할 수 있는 역사학 학술 분야가 모두 포함된다.

아울러, ‘철학은 철학사외 다름 아니다’라는 격언을 받아들일 때, 철학의 사변적 발달은 본질적으로 이야기가 허락되는 곳이다. 이같은 철학적 ‘나레이션’이 물론, 평범한 이야기와 동일한 외관을 띠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여전히 서술물이라는 동일한 영역에 속함을 부정할 수는 없다. 여기서는, 철학적 사유와 관련하여 이야기의 구성적 차원, 철학의 언어적 텍스트적 표현과 관련된 구성적 차원을 강조하는 것에 초점을 둘 것이다.

이야기란 무엇인가 ? 이야기의 조직 원칙을 설명하기 위해서, 하나의 길잡이로서 데카르트의 [방법론 서설]을 취해 보자. 여기서 이야기는 가장 명백한 의미에서 시간 속에서 정돈된 일련의 사건들로 주어진다. 다소 복잡할 수 있으나,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에게서, 예상과 기대, 재기억, 줄거리의 대상을 성립한다. 사건들은 압축되거나 팽창될 수 있다. 데카르트는 자신의 수학 시절, 독일에서의 체류를 들려주며, 이야기를 들려주는 당시의 상태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이야기의 첫 번째 기능은 시간의 흐름을 조직화시키는 데 있다. 아울러 이야기는 장소와 인물들의 배분을 정돈한다. 사고는, 담론을 통한 형식을 취하기 위하여 범주화되어야 한다. 사고는 곧, 인물,  장소, 시대 등의 이야기의 일차적 요소들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이야기는 단지 목록이나 달력이 아니다. 전체적인 본질의 형식에 의해서 사건들이 연결되어야 한다. [방법론 서설]에서 사건들은 진리 추구에 따라서 서술된다.8) 하지만, 데카르트의 다른 저작들을 읽게 되면, 서술적 형식이 본질적으로 사건들의 구상적인 본질과 연관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보다 추상적인 서술성도 존재한다.

  일정한 철학적 맥락에서, 철학 텍스트는 이야기의 형식에 따라서 스스로를 있는 바 그대로 알고, 스스로를 사유할 수 있다. 예컨대, [형이상학적 성찰]은 매우 사변적 이야기에 속한다. 달리 말해서, 서술성은 단지 발화체의 내용으로서만 파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정신이 사유할 때 띠고 있는 본질적 형식으로서 발현된다. 추구 이야기는 따라서 세 가지 수준에서 고려될 수 있다. 추상적, 구상적, 사변적 수준이 그것이다.

 철학적 서술성의 본질에 접근하기 위하여 추구 또는 탐구 이야기의 본질적 양상을 이해하는 것은 유용할 것이다. 추구는 일반적으로 욕망의 실현을 취하는 형식으로서 장애물과 그것의 제거로 이루어진다. 은유적 표현 방식을 차용하면서 데카르트는 하나의 행동을 시도하려는 사람은  어떻게 그 행동의 완수에 필요한 능력을 갖고 있어야 하는가를 설명한다. 이같은 진술 속에는 서술 논리의 모든 알맹이가 다 녹아들어가 있다. 한 편의 이야기의 전체적 형식이 하나의 추구로 이루어질 때, 이 추구의 완수는 추구 주체의 능력을 규정하는 양태성들의 획득을 요청한다. 일반적으로 행위자의 능력에서, 세 가지 유형의 양태성을 구별한다. 의도를 규정하는 양태성(vouloir), 능력을 확실히 해주는 양태성(pouvoir), 한 개 이상의 인지적 영역(savoir)을 규정하는 양태성이 그것이다. 양태적 장 속에서 이같은 세 가지 양태성들의 관계에 따라서 이야기의 상이한 유형들이 존재한다. 데카르트가 과학에 필요한 전주곡으로서 형이상학을 파악했을 때, 과학은 곧 형이상학적 앎의 설정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양자의 차이는 양태적 본질에 속한다.

  이제 우리는 하나의 문제, 욕망, 최초의 갈등과 이같은 욕망들의 실현 사이에 설정된 긴장에 의해서 규정된 공간을 포착할 수 있다. 이같은 공간은 양태적 제약들을 참작하면서 주파된다. 만약, 서술적 행로가 하나의 추구에 의해서 시초화된다면, 우리는 이같은 추구가 칸트가 ‘이성의 관심’이라고 불렀던 것의 기초라는 점을 이해할 것이다. “나의 이성의 관심은 세 가지 물음 속에 집중된다 1.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2.나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3. 하는 무엇을 희망할 수 있는가?”

우리는 이런 의미에서 이야기의 형식이 사고의 도식화의 특수한 경우외 다름 아니라는 결론에 도착한다. 이야기라는 개념 자체는 구성 가능성 원칙을 제공식화하는 것을 요청한다. 프레게가 설정한 이 원칙은 실제로 하나의 발화체의 의미는 이 발화체의 부분들의 의미의 함수이다. 그런데, 서술적 형식은 하나의 발화체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부분들의 합이 아닌, 오직 전체적으로만 기술될 수 있는 요인들을 참작할 것을 요구한다.

하나의 이야기는, 만약 그것의 전체적 제약을 추상화시킨다면, 사건들의 연속들을 조직화시키는 기본적인 행동 도식들로 이루어진다. 이 도식들은 이야기가 취할 수 있는 구상적 또는 추상적  형식으로부터 독립한다. 철학 텍스트에서처럼, 추상적 도식과 사건들이 문제의 핵심이 될 수 있다. 이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는 것은 이야기를 빈번하게 구상적인 형식과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사건은 두 개의 상태 사이에서의 이동으로 기술할 수 있으며, 이 이동은 하나의 행동 또는 과정에 의해서 완수될 수 있다.  사건을 규약 체계에 따라서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사건 = [(상태 1) ---> 행동 --->(상태 2)]

이것은 사건의 도식일 뿐이며, 다양한 가치들에 의해서 투자가 이루어질 수 있다. 하나의 사건은 개방되거나 폐쇄될 수 있으며, 그것을 구성하는 상태들이 그 자신 속에서만 포함된다면 닫혀진 것이며, 이 동일한 상태가 선행하거나 이어져 올 사건들에 속한다면 열린 것이다. 사건 개념은 서술성의 토대 속에 놓인 복잡한 동학이라는 개념을 시사할 수 있다는 장점을 지닌다. 하나의 상태란 안정성의 계기로서 행동과 과정에 의해서 동요된다. 상태 개념은 행동자 문법의 틀 속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상태를 사건의 부분으로서 이해하는 상태 개념에 도달한다면, 우리는 곧 행동자 개념이 상태의 본질을 규명하는 것을 가능케 할 것이라는 점을 깨닫게 될 것이다. 하나의 상태는 하나의 행동자와 과정 사이에서, 하나의 행동자와 다른 행동자 사이에서 연접 또는 이접으로 밝혀진다. 그 결과, 이야기의 과정을 역동적 과정과 연관된 특정 연접과 이접의 연속으로 표상할 수 있다. 이같은 과정들과 그것들이 구조와 생성에 미치는 효과들은 원형적 형태론에 의해서 표상될 수 있으며, 수학자 르네 톰은 그것을 처음으로 기술한 장본인이다.

‘이해하다’, ‘파악하다’, ‘생각하다’, ‘스스로 생각하다’, ‘상상하다’등의 동사들이 어떻게 원형적 형태론에 연관된 동학에 기초하는 근본적인 의미 구조를 산출시키는가를 파악하는 것을 가능케 한다. 서술성은 이야기 개념 속에서 고갈되지 않는다. 서술성 개념에는 구상적 이야기가 갖는 본질적으로 프로그램적인 구조들이 설명할 수 없는 다른 형식들로 가능하기 때문이다.

3) 철학 담론의 상호(간) 텍스트성

바흐진의 대화주의 이론과, 특히 크리스테바가 텍스트 개념에 부여한 이론적 조율 이후로, 우리는 모든 텍스트는 필연적으로 그것에 선행하는 다른  복수 텍스트들의 흡수이며 변형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나의 텍스트는 선행하는 텍스트들과 대화하며 다른 텍스트 전통에 접목될 수밖에 없다. 정확히 말해서, 텍스트는 자신의 자양분을 제공하는 선행하는 담론성의 총화를 전제로 하며 그것을 포함한다. 그 결과 언어학적 관점에서 상호텍스트성은 이를테면 모든 담론의 법칙이다.

하지만 이같은 법칙은 철학에서 보다 엄밀한 의무와 구체적인 형식을 띤다. 다른 담론들과 달리, 철학 담론은 자신의 임무로서 경험적 현실을 발화하는 것이 아니라, 이같은 발화 작용의 진리의 가능성의 조건들을 명시화하는 것을 겨냥하기 때문이다. 바로 존재 자체의 판독 가능성의 조건을 겨냥하는 것이다. 아울러, 이같은 인식론적 규범적 목적을 통해서 또 이같은 수순의 반성적 본질을 통해서 철학 담론은 단지 자신에 선행하는 담론들을 변조하거나 변형시키면서 그것들을 참작하거나 다시 취하는 데서 머무르지 않고, 특히 선행하는  담론들을 넘어서려 한다.  철학 담론은 보다 큰 판독 가능성, 최소한 보다 적절하고 보다 생산적인 물음 제기의 방식을 겨냥한다. 따라서 철학 담론의 경우, 이런 의미에서 공통적 지식의 기술적 서사적 텍스트 구조를 철학적 지식의 이론적 분석적 텍스트 구조로 변환시켜야 할 뿐만 아니라, 선행하는 철학적 지식들의 특이한 담론성을 통합하고 완결지어야 한다. 철학 담론은 따라서 철학소들의 발명이자 동시에 갱신이며, 필연적으로 연속적인 발명이 될 수 밖에 없다. Jean-Louis Galay가 썼듯이, 모든 철학소는 다른 사람의 발명으로부터 발명될 수 밖에 없다.9)

이같은 연속적 발명 과정에 대한 이해는 단지 텍스트 생산 당시의 지배적 견해, 또는 문화적 유산의 발굴과 같은 모호한 심리적 설명으로 환원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철학 담론의 텍스트적 물질성과 심리학적 수용 방식 대신 그 의미를 축소시키는 이중적 환원이다. 아울러, 발화된 내용을 중시한 나머지 발화 작용의 형식을 희생시키는 처사이다. 이같은 이중적 환원을 통해서, 주석가는 모든 담론은 무엇보다 근본적으로 하나의 글쓰기라는 중추적 사실을 누락시키는 것이다. 즉, 철학 텍스트의 저자의 의도와 심리적 역사 뿐만 아니라, 의사 소통의 사회적 규정으로 환원될 수 없는 발화 작용의 물질적 행위라는 점을 말소시키는 것이다. 다른 모든 담론들처럼, 철학 담론은 철저하게 흔적화된 기호들, 각인된 기호들의 짜임과 놀이의 생산이라는 육체적 과정으로 제공되며. 아울러 있는 그대로 본능적 욕구 충동과 감정의 백터로서 제시된다. 요컨대, 철학 담론은 하나의 행위이며 권력 행사이다. Shoshana Felman의 말을 빌려서 더 잘 표현하자면, 담론의 쓰기 행위는 작위의 원형이며, 모델이며 본질이다.10) 말라르메가 목격한 것처럼, 모든 작위는 흔적을 남기고, 영속적으로 촉지 가능하거나 가시적인 효과들을 남긴다는 특징을 갖기 때문이다. 만약, 행위가 현실 속에서 일종의 쓰기라면, 글쓰기는 발화 작용적 신체의 행위의 물질화로 남을 것이다. 그런데  철학 담론이 필연적으로 또 근본적으로 ‘하다’의 차원에 속함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사소하다고 전제된 이같은 파생을 은폐시키고 부정하면서 비로서 철학은 자신을 정당화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달리 말해서, 철학은 자신의 텍스트 파생의 물질적 행위라는 철학에서 사유되지 못한 것을 강제적으로 또 영속적으로 부정함으로써만 비로서 자신을 유의미적 사고로서 규정할 수 있었다. 그런데, 사실은 이같은 철학 담론의 생성은 바로 선행하는 텍스트 구조들의 변형 작업에 의해서 실행된다. 철학적 간텍스트성은 따라서 단순한 해석학적 관계나  심리적 차원에서 파악되서는 안되며, 오히려 새로운 텍스트들의 글쓰기적 구성이라는 화용론적 과정으로서 파악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같은 과정을 어떻게 파악할 수 있단 말인가 ? 하나의 텍스트를 다른 텍스트로 전환시키는 내재적 조작성의 정확한 본질은 무엇인가 ? Galay에 따르면, 이같은 전환은 두 가지 종류의 담론적 기층의 작동을 통하여 두 가지 층위에서 수행된다. 무엇보다, 담론의 지시체를 대부분 규정짓게 될 내용들, 달리 말해서, 독자에게 대상을 지시할 내용으로서, 특정 어휘의 선택이 그것을 도와준다. 이어서, 그것의 의미 작용을 규정짓게 될 이같은 담론의 형식을 이루는 구성 요소들. 교육적 논증적 도식들의 사용, 텍스트의 논리적 가치에 신임을 부여할 수 있게 만들어 준다. 그같은 기층들에서, 함유량의 다소가 무엇이건, 그것은 다른 차원의 텍스트들에 견주어서, 아울러 선행하는 철학 담론들에 견주어서 철학적 특수성 또는 참신성을 보장하는 데 충분하지 않다. 이것을 위해서는, 철학적 상호 텍스트로 명명되는 또 다른 장르의 기층이 개입되어야 한다.

그에 따르면 철학은 대부분의 경우, 철학적 제스쳐들의 모방으로 이루어진다. 즉, 철학 담론은 철학적 제스쳐의 재생산과 변형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각각의 철학 텍스트는 닫힘이자 열림이며 보수이자 변화의 가능성이다. 철학 텍스트는 하나의 언어를 재사용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방식대로 기존의 텍스트적 가능성을 다시 놀이화한다. 철학 작업은 더 이상 발송된 메시지들의 의미론적 내용의 계보에서 또는 형식적 어휘적, 수사학적 구조 속에서 파악되서는 안되며 자신이 후견자로 선택한 사람들에 따라서 철학소의 발명 과정 속에서 파악되어야 할 것이다. 

하나의 철학소의 총체성을 다시 떠맡는 것은 그것의 발명 과정을 변형시키는 것이며, 그것을 재발명하는 것이며, 새로운 문제 설정 속에서 의미를 재부여하는 것이다. 달리 말해서, 철학적 상호텍스트성의 특수성은 텍스트 근원의 담론적 조작들에 연동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철학을 만들어내는 발명 과정의 본질에 있는 것이다. 엄밀한 의미에서의 철학적 상호텍스트성은 철학적 담론의 목적과 장르가, 선행하는 텍스트를 갱신하기 위해서 철학 텍스트가 작업하려하는 언어적 기층과 토양에 새겨 넣는 상감 작용 역할에 의해서만 작동된다.

모든 텍스트는 부분적이건 정확한 한 점에서건, 상호 텍스트적 작업의 산물로서 어떤 철학자도 그것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의 철학소의 독창적 창발을 선명하게 가려낼 수 있다는 주장을 하지 않으면서도, 텍스트 자료와 대화 상대적 텍스트로부터 하나의 텍스트성의 성립의 조건과 양태성을 결정지을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철학적 텍스트가 다른 유형의 담론들과 그것을 차별화시키는 발굴 방향의 선택을 함의한다. 철학 텍스트는 언어의 몇 가지 형식의 강세로부터 결과되는 것이다. 이같은 강조는 자신의 상호 텍스트에 견주어서 새로운 텍스트의 인수를 성립시키며 두 가지 노선을 통해서 실행된다. 참고 자료 활용과 텍스트적 대화주의가 그것이다.

텍스트는 능동적 주체이며 동시에 수동적 주체이다. 그것은 언어의 기표와 기의의 자료를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피동작주이다. 하지만, 동시에, 상징화 과정에 의해서 이같은 표상들의 도식화를 유도한다는 점에서 동작주 텍스트이다. 철학적 관념성을 생산하는 상상력의 조작들은 이미 언어 속에서 완결된다. 언어는 표현 수단이 아니라, 의미 생산의 초월적 조건이다. 이같은 시각에서, 상호 텍스트적 작동은 표상의 담론적 도식들에 의해서 운반되는 시각들의 놀이에 의해서 실행된다. 만약 텍스트가 다른 텍스트 위에서 하나의 흔적으로서 각인된다면, 그것은 단지 보는 방식들의 중개를 통해서이다.


6. 맺는 말


우리는 지금까지 프랑스 철학과 인문과학 사이의 상호 호혜적인 관계를 현대 프랑스 지성사의 중요한 변천으로서 지적하였다. 아울러 우리는 단일 장소와 단일 학파에 할당될 수 없는 프랑스 인문과학은 복수적 현실이며  풍요로운 이론적 시너지들을 작동시키면서 특정 프로그램의 선험적인 방향성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프랑스 철학과 인문과학에서 진행되는 지적 생산의 잠재적 풍요로움을 측정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같은 다양한 추구들의 풍부함과 대화적 상상력의 기준이다. 인문과학의 몇 가지 중요한 전회 가운데, 텍스트성과 서술성은 철학 담론의 중심적 의미를 부여하며, 철학 텍스트의 특수성과 서술물의 중요성을 복권시킨다. 인문과학을 철학과 결부시키던 탯줄을 끊어놓은 것을 축하한 다음에 인문과학은 매우 풍요롭게 철학적 전통을 다시 방문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만약 철학이 더 이상 학문의 제왕의 자리를 주장하지 않는다면, 인문과학은 철학과의 교섭을 통해서 풍부한 재원을 제공받을 수 있다. 인문과학에서 철학적 차원은 이제 하나의 강령이다. 왜냐하면 해석적 다원주의, 가능태들의 다원성, 선택 가능한 세계들의 보존성을 가능케 할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철학은 인문과학의 작업을 괴롭히고 빈곤하게 만들었던 건조하고 비생산적인 양자택일들과 이원적 쌍들을 피하면서 연구 공간의 재개방을 가능케 할 것이다. 그 결과 인문과학과 철학 사이에서 새로운 연대가 형성된다. 더 이상 개념들의 강제 수용과 학제성의 투박한 실천에 기초한 관계가 아니라, 상보적이며 대등한 관계의 초학제성에 기초한 평화로운 관계 속에서 그같은 연대는 이루어진다.







【부록1】

한국프랑스철학회 발기선언문



우리 한국프랑스철학회 발기인 일동은 프랑스 철학이 독창적이고 풍부하며 그러면서도 개별과학과의 유대를 포기하지 않는 고대 그리스이래 서양철학의 학문적인 정통성을 매우 잘 이어가고 있음에 주목하면서 한국에서도 그것을 철저히 연구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 연구 성과들이 활발히 교류되어야 터전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데에 인식을 같이 하여 오늘 이 자리에 모였다. 돌이켜 보면 데카르트나 루소 같은 근대 이후의 큰 이름만 따져도 프랑스 철학의 전통은 학문적 업적의 중대함과 인류 전체에 미친 지대한 영향으로 보아 독일철학 및 영미철학과 더불어 매우 중요한 흐름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한국에서는 그다지 주목받지도 못했고 연구의 역사도 일천하며 대학에서의 위치도 매우 미약한 것은 아직도 제대로 된 프랑스 철학회 하나 없다는 현실이 웅변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프랑스 철학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날로 증대하고, 대중적인 인지도도 높아지고 있으며, 프랑스 철학을 연구하는 인원도 점점 불어나서, 더 이상 프랑스 철학회의 창립을 미룰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에 우리 발기인 일동은 프랑스 철학의 연구를 진작, 증진시키고, 연구인들 상호간의 교류를 활성화하는 데 기여하기 위하여 한국프랑스철학회 창립의 발기를 선언한다.

                                          2005. 3. 26.


발기인: 강영안(서강대), 김상환(서울대), 김석(건대 강사), 김성환(대진대), 김성도(고려대), 김형효(한중연), 남기영(경희대), 류의근(신라대), 류지석(성대 강사), 문성원(부산대), 박성창(서울대), 박치완(외대), 박희영(외대), 서동욱(서강대), 송영진(충남대), 송태현(한국외대 강사), 신인섭(강남대), 양명수(이대), 양운덕(고대강사), 윤성우(외대), 윤평중(한신대), 이근세(경희대 강사), 이진경(산업대), 이현복(한양대), 정계섭(덕성여대), 정순현(성대 강사), 조광제(철학 아카), 차건희(시립대), 최우원(부산대), 최재식(강릉대), 최화(경희대) 황수영(한양대 연구교수) (가나다 순)



【부록2】

한국프랑스철학회 회칙

                 

                                            2005년 4월 15일 제정



제 1 장   총 칙


제1조(명칭) 1. 본 학회는 <한국프랑스철학회>라 부른다.

            2. 본 학회의 프랑스어 명칭은 <Société coréenne de philosophie française>라 한다.

제2조(목적) 본 학회는 프랑스 철학 전반에 관한 학문적 연구와 이해의 증진을 목적으로 한다.

제3조(소재) 본 학회의 사무실은 서울에 둔다.

제4조(사업) 본 학회는 설립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다음의 사업을 한다.

            1. 연구 발표및 토론회

            2. 학회지 『프랑스 철학』(가제) 발간

            3. 저술 및 번역 사업

            4. 공동연구 수행 및 지원

            5. 강연회

            6. 기타 학회에 필요한 사업



제 2 장  회 원


제5조(회원의 종류) 1. 본 학회의 회원은 정회원과 명예회원으로 한다.

            2. 정회원은 본 학회의 목적에 찬동하고, 프랑스 철학에 관련된 모든 학문 분야에서 연구논문을 발표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자로 한다.

            3. 명예회원은 이 학회의 목적에 찬동하고, 이 학회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개인 및 단체로 한다

제6조(회원의 가입) 

            1. 정회원의 자격을 가진 자로서 가입을 원하는 자는 모두 정회원이 될 수 있다. 단, 본 학회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등 특별한 사유가 있는 경우에는 이사회가 제명할 수 있다.

            2. 명예회원의 가입은 이사회의 승인을 얻어야 한다.

제7조(권리와 의무) 1. 정회원은 임원의 선출 및 피선출권을 가지며, 총회에서 본회의 제반 사무를 심의 의결한다.

            2. 회원은 소정의 회비를 납부하여야 한다.



제 3 장  기 구


제8조(총회) 1. 정회원들로 이루어지는 총회는 본 학회의 제반 사무를 심의 의결한다.

            2. 정기총회는 매년 1회 개최하며, 회장이 소집한다.

            3. 임시총회는 필요시에 이사회의 결정으로 개최하며, 회장이 소집한다.

제9조(임원) 본 학회는 다음과 같이 임원을 둔다.

            1. 회장 1인

            2. 부회장 0인

            3. 총무이사, 편집이사, 연구이사

            4. 이사 약간 명

            5. 감사 2인

제10조(선출및 임기) 1. 회장, 부회장, 감사는 총회에서 선출한다.

            2. 이사회는 회장이 구성한다.

            3. 회장, 부회장, 감사, 이사회의 임기는 2년이며, 연임할 수 있다.

제11조(직무) 1. 회장은 본 학회를 대표하며, 이사회를 포함한 각종 회의의 소집 및 주재권을 갖는다.

            2. 회장, 부회장과 이사는 이사회를 구성하여 본 학회의 사업을 계획하고 심의한다.

            3. 총무이사는 본 학회의 일반적 사무와 회계를 담당한다.

            4. 편집이사는 본 학회에서 발간하는 학술 잡지 및 서적의 편집을 관장한다.

            5. 연구 이사는 본 학회의 연구와 발표 관련 사무를 관장한다.

            6. 감사는 매 회계연도 말 본 학회의 회계를 감사하고, 총회에 그 결과를 보고해야 한다.

제12조(이사회) 1. 본 학회의 여러 업무를 계획·심의하기 위하여 회장, 부회장과 각 이사들이 이사회를 구성한다.

            2. 이사회에는 간사를 두며, 간사에게는 이사회가 정하는 수고비를 지급할 수 있다.

제13조(편집위원회) 1. 회장과 편집이사는 협의하여 편집 위원회를 구성한다.

            2. 편집위원회는 학술잡지와 서적의 편집에 관한 제반 사항을 심의·결정한다.

            3. 학술 잡지의 투고 및 투고논문 심사규정은 별도로 정한다.   


제 4 장 재정


제14조(수입) 1. 본 학회의 재정은 회비, 찬조금 및 기타 수입으로 한다.

            2. 회비는 이사회가 책정하며, 총회에 보고하여야 한다.

            3. 회비는 연회비로 납부한다.

            4. 명예회원의 회비는 면제할 수 있다.

제15조(회계년도) 본 학회의 회계연도는 매년 7월1일부터 다음해 6월30일까지로 한다.



부 칙


제1조(개정) 회칙의 개정은 총회의 의결에 의한다.

제2조(시행일) 본 회칙은 2004년 5월 14일부터 발효한다.


1) 이에 관해서는 『수학자 컴퓨터를 만들다』(마틴 데이비스 지음, 박정일/장영태 옮김, 지식의 풍경, 2005)를 참조할 것.


1) 이 말은 미국의 클린턴 정부 때 정보기술에 관한 대통령 자문위원회의 공동의장이었던 빌 조이가 2000년에 발표한 「왜 우리는 미래에 필요 없는 존재가 될 것인가」라는 글에 실려 있다. 이 글은 『나노기술이 미래를 바꾼다』(이인식 엮음, 김영사, 2002)에 번역 수록되어 있다. 


2) 프랑스 철학의 기념비적 업적인 총 4 부작으로 이루어진 철학 백과 사전은 프랑스 철학자들과 인문과학 전공자들의 위대한 성취물이라고 볼 수 있다. 필자는 이 논문을 준비하면서 평소 철학적 체조 훈련을 위해서 규칙적으로 열람했던 이 사전들을 관련 주제들에 초점을 두고  선별적으로  숙독했다.  본 발표 내용은 그같은 선별적 독서의 재배치로서, 이 사전들로부터 핵심적 단초를 제공 받았음을 밝혀둔다. Encyclopédie Philosophique Universelle, Publiée sous la direction d'André Jacob, volume I:  L'Univers philosophique, volume II: Les notions philosophiques (Dictionnaire), volume III: Les oeuvres philosophiques (Dictionnaire). volume IV : Le discours philosophique.


3) 대표적인 시도는 다음과 같다. Francois Doss, Histoire du structuralisme, t.1, Le Champ du signe, la Decouverte, Paris, 1991. t.2 Le chant du cygne, La Decouverte, Paris, 1992.)


4) E. Benveniste, Problémes de linguistique générale, Paris, Gallimard, 1966 (voir en particulier : Catégories de pensée et catégries de langue", p,63-74.


5) cf. François Dosse, L'Empire du sens, La découverte, 1995, 406-417.


6) 개념의 제공자로서의 철학의 역할에 대해서는 다음 논문 참조. Nicolas Dodier, "Agir dans plusieurs mondes", Critiques, n. 529-530.


7) V. Descombes,, 《L’esprit comme esprit des lois》, in Le Débat, n˚ 90, 1996, p. 93-114.


8) 나는 어렸을 때부터 학문 속에서 자랐고, 그리고 사람들이 학문을 배움으로써 생활에 유용한 모든 것을, 명석하고도 판명한 인식을 터득하리라고 일깨워 주었다. 그러나 내가 나에게 주어진 모든 과정을 잘 알게 되고 모든 학문의 과정을 전부 이수하여 학자들 틈에 끼이자, 나는 전적으로 의견을 달리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나는 점점 더 나의 무지를 발견하게 된 것을 제외하고는 다른 이점을 찾지 못하였고, 그리하여 나는 그토록 많은 회의와 당혹에 빠지게 되었다. 그런데 나는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학교에 다녔고,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학자들이 거기에 있다고 믿었었다. 나는 거기에서 다른 사람들이 배우는 모든 것을 배웠다. 사람들이 우리들에게 가르쳤던 모든 학문들에 대하여 내가 만족을 느끼지 못하여, 나의 손아귀에 들어오게 된 아주 진귀하고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모든 종류의 학문을 담은 책들을 섭렵하였다. 뿐만 아니라 나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평판도 알게 되었고, 또 우리 스승들의 뒷자리를 이을 만한 실력을 가진 자들이 학우들 사이에 있었지만, 내가 결코 나의 학우들보다 실력이 못하다고 평가받지는 않았다. 다른 한편으로 훌륭한 정신의 소유자들을 가지고 있어서, 우리의 세기는 그전 세기에 비하여 비교가 안될 만큼 화려하고 풍성하게 꽃피어 있는 것 같았다. 이러한 세기의 분위기는 나로 하여금 모든 다른 사람들을 판단함도 무방하고, 또 세상에서 내가 기대했던 것과 같은 학문이 없다는 결론을 내려도 무방하게 하였다(    르네 데카르트, 『방법서설, 성찰 외』, 김형효 역, 서울: 삼성출판사, 1992, pp.45~46). 비록 내가 영광을 견유학파들처럼 경멸한다고 공언하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거의 엉터리 같게만 보이는 그런 학문[과학]에 대하여 별로 존경심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리고 엉터리 학문 때문에 나는 연금술사의 감언에도, 또 점성술사의 예언에도, 마술사의 환술(幻術)에도, 또 그들이 실제로 아는 것보다 더 많이 안다고 호언장담하고 허풍을 떠는 사람들의 교활함에 의하여, 또 그들의 약속에 의하여, 사기당하지 않기 위하여, 그것이 어떤 점에서 타당한가를 인식하고 검토하려고 생각하였다.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내가 나의 스승들의 주의에서 벗어나도 좋을 나이에 이르자마자, 나는  완전히 그런 학문의 연구에서 떠나게 되었다. 이리하여 나는 나 자신 속에서 발견될 수 있거나, 세게라는 커다란 책 속에서 발견될 수 있을 학문 외의 다른 학문은 더이상 연구하지 않을 것을 결심하고, 나는 나의 나머지 청춘을 여행하거나, 궁정과 군대를 견문하거나, 여러 사람들의 여러 가지 기질과 생활조건을 찾거나, 여러 가지 경험을 쌓거나, 운명이 나에게 지시해 주는 만남 속에서 스스로를 체험하거나, 또 어디서든지 내가 이익을 끄집어낼 만한 사물들에 대하여 사려깊은 숙고를 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왜냐하면 자기 서재에 앉아서 지식인이 하는 추리(推理)와, 그 추리에서 상식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허풍만을 유도해 내는 것 이외의 다른 결과가 나오지 않는 것보다는 오히려 각자에게 중요한 사건들에 대하여 각자가 만드는 추리 속에 더 많은 진리가-물론 그가 판단을 잘못한 경우에는 사건이 지난 다음에 곧 그 추리를 정정하겠지만-있을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연구실 속의 지식인은 자신의 연구성과에 대하여 그것을 더 그럴듯하게 나타낼 양으로 많은 교묘한 기지(機知)를 쓰기 때문에 더욱 나는 경계해야 한다고 믿었다. 나는 나의 행위에 있어서 매사를 분명히 보기 위하여, 그리고 나의 생애에서 확실성을 가지고 전진하기 위하여, 참과 거짓을 구분하는 것을 배우려고 언제나 무척 애를 썼다(같은 책,  pp.49).


9) J.-L. Galay, Philosophie et invention textuelle, Paris, Klincksieck, 1977.


10) Sh. Felman, Le scandale du corps parlant, Paris, Le Seuil, 19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