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석에 대하여]를 읽고 있는데 몇년 전에 해석학회에서 했던 김서영선생님 논문에 대한 논평이 생각나서 찾아 보았다.
의미있는 작업이 이어질 수도 있겠다는 희망적인 생각
김서영교수의 「리쾨르의 『해석에 대하여』를 통해 프로이트 다시읽기」에 대한 논평
김선하(감신대)
아마도 헤겔 이후 변증법을 가장 많이 사용하는 사람은 폴 리쾨르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리쾨르의 철학은 변증법적 방법을 통한 종합에 천착하고 있다.
어떤 철학이건 그 이론이 아무리 철옹성같이 구축이 되어 있다고 해도 그리고 상대적인 이론과 절대로 그 접점을 찾아볼 수 없을 것 같은 사유에도 리쾨르의 해석학은 양자의 종합을 이루어내는데, 그의 철학의 깊이가 이러한 넘어설 수 없을 것 같은 경계를 넘어서 새로운 지평을 마련하는데 있다고 생각된다.
김서영교수(이하 저자)의 논문에서도 리쾨르 해석학이 문제를 풀어가는 동일한 방식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정신분석학에서 충동을 중시하는 에너지론과 기표를 중시하는 해석학을 대면하게 한 후 상징이라는 보다 넓은 의미의 기표를 사용하여 양자의 변증법적 종합을 이루어내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도 정신분석에 대한 리쾨르의 독특한 시각을 볼 수 있다. 곧 정신분석은 환자를 과거에 가두는 고고학적 결정론이 아니며 그보다는 현재와 과거에 대한 반성적 성찰을 통해 개인을 미래로 이끄는 욕망의 해석학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해석의 갈등』에서는 고고학과 목적론의 변증법으로 전개한다.
저자가 지적하다시피, 리쾨르는 상징 개념을 둘러싸고 융이 프로이트를 비판하는 방법론으로 프로이트의 이론을 설명하고 그것을 더욱 깊이 있는 차원에서 재해석하고 있다. 정신분석학과 분석심리학의 영역에서 이러한 불가능한 과제는 한 번도 시도된 적이 없으며, 원형, 신화, 상징, 성 등 접점을 가지지 않는 두 영역의 개념들을 자연스럽게 이어내어 정신분석의 한계를 극복한 사례 역시 전무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리쾨르의 프로이트 독해는 현대 정신분석의 패러다임을 새롭게 구축할 수 있는 혁명적 지도를 제시한다고 본 저자의 평가는 적실하다고 사료된다.
저자의 논문은 정신분석과 해석학에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친절하고 상세하게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형식적으로라도 논평문의 틀을 갖추기 위해서 몇 가지 질문을 하는 것으로 논평문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첫 번째 질문은 논문의 내용이나 형식에 대한 것이 아니라 논문을 읽으면서 느낀 논평자의 느낌에서 나온 것이다. 정신분석의 역할은 히스테리적 비참을 일상의 불행으로 바꾸는 것이라는 프로이트의 회의적 설명에서 볼 수 있듯이 프로이트 정신분석은 과거에서 기인한 불행, 불균형, 통제 불능, 불안정, 파괴의 서사로 구성되어 있다. 반면에 리쾨르는 프로이트와 헤겔의 조우를 도모함으로써 정신분석에 의도와 방향성을 불어넣으면서 미래에 대한 희망적 이야기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이 양자의 차이는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정신분석학에 대해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한 논평자는 이 두 사람의 정신분석이 이루어지면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프로이트 못지않게 끊임없이 미래적 희망을 구축해내려고 하는 리쾨르도 일종의 예언자적 강박증이 있었던 건 아닐까? 이에 대한 저자의 생각이 궁금하다.
두 번째 질문. 저자가 지적하고 있듯이, 벤야민은 역사 이전의 과거와 개인의 구체적 현재가 교감하여 새로운 미래를 가능하게 만드는 힘을 알레고리적 상상력이라고 불렀다. 저자는 이것이 리쾨르가 말하는 ‘상징’ 속에서 일어나는 일임을 시사하고 있다. 저자의 말대로 정신분석의 정형적 상징을 극복하고 닫힌 서사를 열 수 있는 도구가 바로 정신분석의 해석이라고 믿었다는 차원에서 저자의 암시는 옳다. 하지만 논평자가 보기에, 상징에 대한 벤야민의 생각과 리쾨르의 생각은 차이가 있다. 벤야민에게 상징은 알레고리와 대조적으로 잠시 머물다가 사라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 유사하게 폴 드 만도 알레고리의 우월성을 주장했다. 상징은 이미지와 실체를 결합하여 어떤 초월적 지식이나 진리를 암시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드 만이 보기에 그런 지식이나 진리에 도달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알레고리는 상징과 대조적으로 더욱 유용하고 정직하다. 그것은 그 자체의 기원으로부터 떨어져 있다는 데에 주목하게 하는 것이다.
반면에 리쾨르에게 상징은 직접 의미, 일차 의미 또는 문자 의미가 흘러넘쳐 다른 의미, 곧 간접 의미, 이차 의미 또는 상징 의미를 낳은 의미 구조를 가리킨다. 해석이란 겉에 보이는 뜻 속에 숨겨진 뜻을 풀어내는 일이요, 문자 의미 속에 함축된 의미의 차원을 찾아내는 일이다. 메타포나 알레고리는 이러한 상징을 해석하는 작업 과정 속에 포함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벤야민의 알레고리적 상상력이 자기를 중심으로 어느 해석의 종점이 있다면 리쾨르 상징 해석은 타자에 대해 끝없이 열린 자기이해의 우회로로 봐야 하지 않을까?
세 번째 질문. 리쾨르는 정신분석의 경제학적 설명과 의미를 다루는 해석과의 관계에 대해 물음을 던지면서, 역동은 언어로 이행되어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동을 전적으로 언어에 종속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가 말하는 욕망의 의미론은 이러한 차원에서 언어로 환원될 수 없는 지점을 포함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한다. 그러므로 욕망의 언어는 부재하는 대상에 대한 언어이다. 정신분석은 ‘사실’을 다루는 학문이 아니라 부재하는 대상을 ‘해석’하는 작업이다. 정신분석은 그러한 부재 자체를 다룰 수 없으며 다만 그것을 의미 있는 개인의 역사로 표현하는 표상들을 해석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저자는 논문의 말미에서 표상에 연계되지 않는 정동에 대해서 스피노자에 기대어 어떤 시도를 제안하고 있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정동은, 무한한 관념의 연쇄 속에서 분리와 결합이라는 기제를 통해 적합한 사유와 연결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정동은 나쁜 정동이었을 때의 힘을 잃게 된다. 즉 그것에 대해 명확한 관념을 형성할 때 정동은 더 이상 수동적인 정서가 아니라는 스피노자의 말은 주체 스스로 원인에 대한 서사를 구축하고 근본적인 환상의 구조를 재편하여 분석의 종결에 이르는 정신분석의 과정을 묘사하고 있는 듯하다.… 이 여정에서 우리는 정서에 예속되었던 인간이 나쁜 정서의 힘을 이겨내고 마침내 영원의 관점에서 자신을 볼 수 있게 되는 과정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저자의 입장은 논평자가 보기에, 해석학적 사유의 한계를 넘어 종교적 수행에 가까이 가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러한 느낌에 대한 저자의 생각이 궁금하다.
끝으로 형식적인 질문 한 가지만 덧붙이면, 논문은 리쾨르의 비교적 전반기 저서 『해석의 관하여』의 프로이트 분석을 주제로 쓰여 졌다. 이와 관련한 국내외 논문들이 있었을 텐데 이에 대한 참고가 없는 것에 대한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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